삼국시대부터 해상무역항 성장, 고려·조선시대 조창항으로 번성
1899년 5월 1일 근대항으로 개항, 일제강점기 한반도 수탈에 악용

2019년 5월 1일은 마산항이 근대항으로 개항한 지 120주년 되는 날이다. 1899년(광무 3년) 5월 1일 전라북도 군산(群山), 함경북도 성진(城津)과 함께 문을 연 마산항은 한 세기하고도 2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 수출과 물류, 경제중흥 핵심으로 기능을 해왔다. 비단 근현대 산업화·민주화 시기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기부터 정치,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마산' 더 나아가 '통합 창원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창원시는 근현대사 기념사업 중 하나로 내달 1일 마산항 개항 12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경남도민일보>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동안 마산항 역사를 되짚어보고 산업화·민주화 시기 대한민국 수출 산업 중추로서 이곳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2회에 걸쳐 조명한다.

▲ 1899년 5월 1일 근대항으로 개항한 마산항이 오는 5월 1일 개항 120년을 맞는다. 마산만 전경. /창원시

◇골포국에서 고려시대까지 = 남해를 낀 창원은 예부터 국제도시 면모를 갖췄다. 삼국시대 가야 남부 포상팔국 중 해상무역을 주도한 골포국이 자리했다. 골포국은 마산만을 낀 창원 일대에서 번성했다. 당시 대부분 정치 집단은 중국이나 인근 지역과 교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골포국 또한 바다를 낀 자연지리적 조건에 비춰 교역을 바탕으로 성장·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창원 성산 패총에서 중국 한나라, 일본계 토기나 무기류가 출토된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성산 패총에서 야철터가 조사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토산조에 불모산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으로 봐서 골포국은 바닷길을 이용해 철을 왜는 물론 인근 한(韓)의 여러 나라에 수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마산항이 국제항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부터다. 1274년(원종 15년)과 1281년(충렬왕 7년)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당시 합포현에 정동해영을 설치해 출진 기지로 이용하면서다.

합포현에는 이전부터 고려 12조창 중 하나인 석두창(石頭倉)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두창은 경상도 동남부 지역 세곡을 모아 조운(漕運)을 이용해 개경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했다.

대몽항쟁기에는 마산 일대에서 삼별초가 출현하는 등 외세 침략에도 분연히 일어나 맞서기도 했다. 여몽연합군은 일본과 직선거리가 가깝고 석두창이 있어 군량미 조달이 쉬운 마산을 일본 정벌 전진기지로 삼았다. 하지만 고려 말 조선 초 왜구 출몰로 피해가 극심해지면서 마산창(석두창 후신)이 폐쇄(1403)되고 경상우병영성이 설치되는 등 마산항 일대는 상업·군사도시로 변모가 이뤄지게 된다.

▲ 1899년 5월 1일 근대항으로 개항한 마산항이 오는 5월 1일 개항 120년을 맞는다. 창동에 있는 조창 터 표지석. /창원시

◇조선 후기 마산창 부활 = 조선 초 1403년(태종 3년)에 폐쇄된 마산창은 1760년(영조 36년) 다시 문을 연다. 지금 마산합포구 창동거리길 58 일대로 표지석에는 이곳에 모두 8동 53칸에 이르는 조창 건물이 자리했다고 쓰여 있다. 마산창에는 조운선 20척이 편성돼 있었다. 이 배들은 창원, 함안, 칠원, 진해, 거제, 웅천, 의령 동북면, 고성 동남면 등 8개 고을에서 거둬들인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성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산합포구 창동(倉洞) 지명도 조창이 있던 동네라 해서 지어진 것이다. 이때는 마산앞바다가 매립되기 전으로 현재 어시장 자리까지 바닷물이 들었는데 창동 언덕에서 보면 바로 아래 바다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창고에서 배로, 배에서 창고로 곧장 물건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조창이 들어서면서 마산포는 조선 후기 남해안 최대 교통·상업 중심지로 번창했다. 각종 관아 건물과 상점·민가가 들어섰고 자연스레 사람이 몰렸다. 이때 중성, 동성, 서성, 오산, 성산, 성호 등 6개 마을에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됐는데 이것이 오늘날 마산을 이루는 기틀이 됐다.

▲ 1899년 5월 1일 근대항으로 개항한 마산항이 오는 5월 1일 개항 120년을 맞는다. <마산포개항청의서>. /창원시

◇자율 개항설 VS 강제 개항설 = 세월이 흘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성립하고 3년 뒤인 1899년 5월 1일 마산항은 근대적 의미의 '개항'을 하게 된다. 형식상으로는 우리 정부 스스로 문을 연 자개조약항(自開條約港)이나 인천, 부산 등과 같이 러시아, 일본을 비롯한 열강 개항 압력이 전혀 없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개항 배경과 계기를 두고 자율 개항설과 강제 개항설이 맞서고 있다.

자율 개항설을 주장하는 쪽은 1898년 의정부 대신들이 마산항 개항을 놓고 찬반 투표를 벌인 '규장각외부청의서'를 근거로 든다. 대한제국 의정부회의에 제출된 청의서에는 '상업을 발전시켜 만국 이익을 증진할 목적으로 마산포 등을 개항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한 앞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한 아관파천(1896)으로 일본이 개항을 강요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점도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반면에 강제 개항설을 주장하는 쪽은 정부 각료가 찬반 투표를 했다손 치더라도 이게 자주적인 의사표시로 볼 수 있느냐는 의견이다. 당시 마산포 일대에서는 러·일 간 주도권 경쟁이 한창이었다. 옛 한국철강 자리인 자복동에 러시아 함대가 깃발을 꽂고 영지(領地) 선언을 하자 일본 역시 배후에서 지역 실권을 놓치지 않으려 대한제국 정부와 교섭을 벌였다. 지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홍중조 선생은 "외무대신 박제순이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 부탁을 받아 창원항 감리에게 은밀하게 지시를 내린 사실이 있다"고 말한다. 내각 실세인 박제순이 일본의 부탁을 받아 마산, 군산, 성진 세 곳 개항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산항 개항은 열강 제국들의 강제성을 띤 끈질긴 요청과 회유 그리고 협박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뤄졌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 1899년 5월 1일 근대항으로 개항한 마산항이 오는 5월 1일 개항 120년을 맞는다. 1960년 당시 마산세관 모습. /창원시

◇일제강점기 마산항의 고난 =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간 갈등은 1905년 러·일전쟁 발발로 폭발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이후 한일강제병탄이 이뤄지면서 일제가 마산 내 주도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마산항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한일강제병탄조약이 체결된 지 4개월 뒤인 1910년 12월 일본은 마산항을 개항장이 아닌 병참기지로서 수탈 물자와 전쟁 물자를 실어나르는 적출항(積出港)으로 사용했다. 이후 일본인 마산세관장 허락이 없이는 마산항에 드나들 수도 없게 됐다. 해방 이후 1949년 6월 29일 대한민국 정부가 대통령령 39호로 마산항을 개항장으로 지정한 뒤에야 비로소 무역항으로서 제 역할을 찾았다.

이처럼 고대~근대 마산항 역사는 '국제해양항만도시 창원'의 정체성을 품고 있다. 이는 (내일 다루게 될) 산업화 시기 마산수출자유지역, 창원국가산업단지 발전을 견인한 국제무역항으로서의 마산항 기능·역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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