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로 국학연구에 큰 관심
탄압 피해 마산서 민족교육 활동

자산 안확(1886~1946·사진) 선생은 '국학자'이자, 문화사가, 민족주의자로 불린다. 국학 쪽에 비중을 두고 철학·역사·종교·상업·국악·미술·체육·군사 분야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가 국학연구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우리 문화의 특수성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항일애국운동'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확은 1907년 가을 진주 안동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이 학교는 같은 해 4월 15일 호주 장로교 총회 소속 선교사 커렐이 중심이 되어 세워졌다. 따라서 창신학교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선교사와 기독교계가 운영하던 학교라는 점에서 일제 탄압이 덜 미치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1년 3월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온다. 1910년 한일합병(경술국치)으로 일제 탄압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당시 경남 '수부도시'였던 진주는 일제 식민지 지배가 다른 지역보다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마산은 구한말부터 일본·러시아가 군사 요충지를 확보하고자 치열하게 다투었던 곳이다. 일제에 의해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학교를 비롯한 각종 근대적인 시설들이 일찍부터 설치됐다. 일본과 비교적 가까워 일본 유학 등 왕래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그가 일제 탄압을 피해 국권회복을 목표로 민족교육 활동을 하고자 마산으로 이동한 배경이다.

그는 1913년 창신학교 교감이 된 이후 강건한 신체 단련을 위한 '체육 교육' 중요성을 역설하며 창신학교 야구부 결성(1914년)을 주도, '창원 야구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로 남았다. 그는 같은 해 5월 17일 창신학교 개교기념일 행사로 추산정(현재 창원시립마산박물관 근처)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시국강연회를 처음 열기도 했으며,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학사인 <조선문학사>를 출간했는데, 마산지역 3·1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느낀 점과 한계 등을 마산에서 집필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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