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학교 1923년 소식 후 기록 없어
주권회복 운동 잦아 일제 압력 추정

'1923년 5월 26일 마산체육회 주최로 개최한 마산소년야구대회에 창신학교 1·2팀, 보통학교 1·2팀, 주일학교, 사해, 수원, 비룡 등 8개 팀이 출전했다. 창신학교 1팀이 주일학교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1914년 창단, 마산을 넘어 경남 야구사 출발점인 창신학교 야구부와 관련한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창단 이후 어떻게 운영되고 변화해 갔는지는 물론 어떤 이유로 해체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같은 해 창단해 창신공고 시절을 거쳐 2000년대 후반까지 명맥을 이어온 축구부와 비교하면 아쉬움은 더 커진다. 지역 야구 뿌리는 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까.

<창신 100년사>를 집필한 김재하(61·창신고) 교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봤다.

"아무래도 야구는 굉장히 복잡한 스포츠잖아요. 공 하나와 적당한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축구와 달리 배트에 공에, 세밀한 규칙까지…. 자주 할 수 있는 스포츠는 아닌 셈이죠. 여기에 새끼줄이나 헌옷을 뭉쳐 공을 만들고 나무막대로 방망이를 만들거나 선교사에게서 용품을 받았던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마냥 이어가긴 어려웠던 것으로 보여요."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1925년 마산 의신학교와 진주 시원여학교는 우리나라 최초 여자 야구 경기를 열었고, 1929년에는 마산 수원야구단 주최로 전마산소년야구대회가 처음 개최되기도 했다. 야구 저변이 점차 확대한 모양새인데, 유독 창신학교에서는 그 맥이 끊겼다.

김재하 교사는 원인을 '창신학교 특수성'에서 찾았다.

"일찌감치 선교사가 세우고 교장으로 외국인이 재임하다 보니 일제가 처음에는 함부로 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어요. 이러한 점을 활용해 학교 내에서는 주권 회복과 관련한 교육·모임 등의 움직임이 많았고요. 그 결과가 3·1운동 등으로 이어지자 일제도 결국 손을 쓴 듯해요. 야구부 해체가 한 예로 보이는데, 순수 스포츠 클럽인 다른 학교 야구부와 달리 창신학교 야구부는 독립운동 모임의 한 축으로 본 거죠.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창신학교 야구부 해체 이유는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싶어요."

나라 잃은 시절, 어쩌면 독립·희망 상징과도 같았을 창신학교 야구부.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 기록조차 희미하지만 김재하 교사는 창신학교 야구 부활을 꿈꾼다.

"정신의 바탕에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야구부를 세운 원동력이에요. 오늘날도 강인한 체력 위에 쌓인 학문은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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