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3·15의거 그리고 부마항쟁
권력중심지 아닌 마산서 시작된 '역사'

경남의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중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터진다. 1919년 3·1독립운동 시기에 경남은 그다지 독립의 열기가 강한 지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이 적었고, 따라서 일찍부터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가옥세, 주세, 연초세를 부과하였고, 철도건설을 통해 토지와 노력 수탈이 심한 상황이었다. 독립운동의 주축인 천도교가 강한 지역도 아니었다. 2월 28일 독립선언서 2만 부를 배분하면서도 경남은 30부 정도 기독교를 통해 나누어 주었다. 경남에는 호주의 장로교회를 통해 배포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3월 3일 신마산의 선언서 배포 시에도 그다지 열기가 가득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한 지역이 되었다. 박은식의 기록에 따르면 경상도 지역에서 25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전체 사상자의 3분의 1 정도가 발생한다. 시위 횟수에 비교해 2배, 시위에 참여한 사람 수와 비교하면 4배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물론 경남의 경우만 따로 내어놓고 평가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진해, 신마산과 같은 일본인 전용 거주지역을 제외하고는, 함안, 칠북, 진동, 합천 등지에서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같이 역사적인 사건은 권력의 중심지가 아닌, 이미 장악했다고 여기는 지역에서 발생하곤 한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시민들은 아침 일찍 투표장에 나섰다. 오전 7시에 투표장에 도착하여, 투표하고 함에 넣으려고 하니, 함이 이미 꽉 차 있었다. 즉 사전에 기표하여 누군가가 넣어 놓았던 것이다. 이에 마산의 민주당은 오전 9시 투표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투표 무효를 선언하고 투쟁을 선포하였다. 마산 오동동 사거리 인근의 민주당 사무소 앞에서 확성기를 틀고 선거 무효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이후 10여 명의 사망자가 발견되고, 급기야 4월 11일에는 3·15 시위 때 행방불명된 김주열 당시 마산상고 합격생이 마산시청 뒤, 경찰서 인근 바다에서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자, 분노한 시민들은 마산 2차 의거를 일으키게 된다. 이로써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4월 26일 대통령 퇴진을 선언한다. 학생이 주동이 된 의거로 정권이 퇴진한 유일한 세계사의 사건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찬탈하려는 세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2시경 경남대학교 도서관, 현재는 교양융합대학으로 사용되는 건물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유신 선언 7주년을 맞이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할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던 당국은 전국에 걸쳐 감시와 준비를 철저히 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경남대학은 유신 시기에 저항이 유독 적었던 대학이었다. 시위가 시작되자, 이미 부산 시위에 위기를 감지한 박정희 대통령은 내부적인 결정을 통해 향토사단인 39사단에 병력출동명령을 내린다. 시위는 더욱 거세져서 10월 19일 밤에도 시위는 계속된다. 이에 당국은 다시 1개 특전여단을 추가로 투입하여 완전히 저항의 의지를 꺾을 정도의 위력을 보여 준다. 김재규의 기록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의 강경진압에 맞서 박정희 대통령을 10월 26일 저격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사건은 권력의 가장 취약한 고리에서 발생한다. 떠들고, 소리치는 곳이 아니라, 조용하던 곳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짧지만, 강력하게, 격렬하게 발생하고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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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이 그러하였다. 변방이 그러하였다. 변방이 움직이면 중앙이 무너진다는 교훈이 그래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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