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 돌 듯 비슷한 일상
낮잠 자거나 여행을 하거나
삶에서 쉼은 꼭 필요한 것

4월엔 카페 문을 일찍 닫는 날이 며칠 생기지 싶다. 바리스타 중 한 명이 긴 휴가를 떠나기 때문이다. 손님들에게 송구한 마음이 들지만 나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환기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운전하다가 졸음이 오면 쉼터에 차를 세워야 한다. 조금 늦더라도, 몸을 온전히 신선한 공기에 맡겨야 한다. 낯선 벤치에 앉아서 익숙한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니면 고개를 이렇게 저렇게 돌려본다. 그러면 어느 순간 정신이 든다. 그러면 다시 달릴 수 있다.

H는 서글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밤 그늘 같은 이야기가 배경이 되어서 도리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삶 속에서 얻은 숙제가 힘겨울 때, 자신의 앞날이 답답할 때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도 필요하지 싶다. H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또 벗들과 외국으로 간다니 얼마나 응원할 일인가.

▲ 놀이터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 /정인한 시민기자

◇낮잠

로스팅실 안에는 접이식 침대가 있다. 우리는 교대로 오침을 한다. 그 시간 동안 웹서핑을 하든, 카톡을 하든 강제하지는 않지만, 낮잠을 권한다. 잠이 오지 않아도 누워서 명상했으면 한다.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간은 바리스타의 하루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 나름 환기하는 것이다. 손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마음에 있는 그림을 따라가는 시간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호흡에 집중하고 몸이 가벼워지는 상상을 한다. 유연해지는 나를 그려본다. 그러면 피로가 풀린다. 그러다가 툭 떨어지듯이 짧은 낮잠에 빠지면 마치 긴 잠을 청한 것처럼 상쾌하다. 휴대전화를 리부팅하는 것과 비슷하다.

◇향기

며칠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손님이 아기를 밖에 두고 문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혹시, 여기 노키즈존인가요?" 나는 잔 받침을 리넨으로 닦으면서 웃었다. "저희 웰컴 키즈존이에요, 편하게 있으시면 됩니다." 엄마는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잠든 아기는 12개월도 안 되어 보였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기 이뻐요. 몇 개월이에요?" 나는 내향적인 편이지만 아기와 동행하는 손님을 보면 말이 많아진다. 잠은 잘 자는지 물어본다. 아기들이 내 수염에 관심을 가지면 안아준다. 뭐랄까, 우연히 같은 과 후배를 만난 느낌이다.

육아하는 집은 특유의 향이 있다. 아기도 그것을 아는지 연신 콧구멍을 벌렁거린다. 조금은 비릿하지만, 바다의 그 느낌은 아니다.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약간은 정체된 공기의 질감이 있다. 미세먼지가 많다고 뉴스에서 떠드니, 창문을 열지도 못하겠다. 우리는 비혼 시절, 결혼을 원했다. 영원한 소속감과 가족과 아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것이 일상이 되면 권태로 빠질 수 있는 것 같다. 마치 미래를 향해 흐르던 시간이 댐에 막힌 것처럼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한다. 반복되는 하루는 쳇바퀴의 회전을 닮았다.

◇휴식

좁은 공간에서 부부의 감정도 넘쳐나지만, 아기의 감정도 넘쳐난다. 자식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욕구와 요구를 분출하고 명령한다. 풀어나가지만 어떤 날은 갑갑하다. 부유하는 숙제들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봄볕은 우울하고, 봄비도 겨울비 같다. 그럴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을 열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의 고민을 듣고, 또 만나서 산책로를 걷는 것은 어떨까. 먼 산을 보고, 하천의 흐르는 물을 보며 바다 같은 푸른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그 길가에 마음 편히 들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잠시 머무는 것도 좋겠다. 그것이 우리 카페라면 기쁜 일이다. 구석진 곳에 가지 않고 봄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카페의 가운데에서 쉬었으면 한다. 거기서 편하게 마음을 풀었으면 한다.

작은 차를 타고 하루 동안 집을 떠나는 것은 어떨까. 카시트가 낯설어서 아기는 오랫동안 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평생 좌절로부터 보호해줄 수 없다면, 몇번의 꺾임을 부모라는 그늘 안에서 함께 하는 것도 현명할 듯싶다. 내가 모든 상처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도 때로는 숨을 쉴 구멍이 필요하다. 환기가 필요하다.

◇작은 창

아빠가 되려 할수록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세상에는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주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넘치는 장난감 중에서 딸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내가 딸에게 남길 수 있는 유산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세상에서 비싼 값을 쳐주는 물건보다, 마음에 작은 창을 하나 내어주고 싶다. 창가에는 작은 화초를 두고 싶다. 계절과 관계없이 여린 햇살과 물이 있으면 꽃을 피우는 녀석을 심어 놓으려 한다. 어떤 날은 비가 와도 창을 열어 놓았으면 한다.

두 딸이 낯선 길을 마주할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다만 삶 속에서 진짜 여행을 하길 바란다. 그저 과시하기 위한 사진 몇장을 찍어오는 것보다, 자신과 마주하길 바란다. 다른 빛과 온도와 공기의 질감 속에서, 사랑에 대해, 인생에 대해,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해 사유하길 바란다. 이국의 땅을 걸으며 체력을 소진하고 포근한 침대에 누웠으면 한다. 타향의 바다에게 고민을 털고, 해변에서 작은 지혜를 주워왔으면 한다. 파도가 마음을 씻어 줄 것이다.

◇바리스타

H도 그랬으면 좋겠다. 결국 귀향해야 하는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씨앗을 파우치에 넣어왔으면 한다. 바리스타는 '바'른 마음을 가지고 손님을 위해서 '리'부팅을 선물해야 한다. '스'스로 마음을 환기하고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곧 결혼하고 아기가 태어나겠지. 그러면, 먼 나라의 여행은 한동안 불가능하다.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박한 창문과 씨앗이 필요하다. 그녀의 앞길을 축복한다.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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