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듯 천천히 읽는다…그 '깊은'문장들
하동 출신 경상대 졸업한 저자
단편소설 8편 엮어 책 발간
특유의 은유적 문장 돋보여
서사 아닌 행간 의미에 집중

대화를 하면서도 그는 늘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지난가을 소설가 임수현(43)과 마주 앉은 진주 어느 카페에서였다.

그는 하동이 고향이다. 경상대 국문학과를 나와 진주에서 2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고는 서울로 떠나 출판일로 밥벌이를 하면서 소설을 썼다. 2008년 단편 '앤의 미래'가 문학수첩 신인상에 당선 등단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서울 어느 산동네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임수현은 아주 신중하게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대학노트에는 깨알처럼 이야기들이 메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다작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드문드문 소설집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문학과 지성사, 2011), 장편소설 <태풍소년>(문학과 지성사, 2012)을 냈다.

당시 그는 한 문학창작공간에 입주해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해 말 소설집 <서울을 떠나지 않는 까닭>(문학수첩, 2018년 12월)이 나왔다. 따로 기별이 없었기에 최근에야 그가 새로 책을 낸 사실을 알았다. <서울을 떠나지 않는 까닭>에는 단편 8편이 실렸다.

임수현은 느낌이 왔을 때 일필휘지로 소설을 써내는 작가가 아니다. 그런 충동이 오더라도 자신을 억누르며 한 문장 한 문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하여 소설의 문장들이 쉽게 넘겨지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소중해 보이기 때문이다. 단편 '쑥으로부터'의 첫 문단을 보자.

"우리는 시장에서 만나 숲에서 헤어졌다. 낙원의 끝이 바다가 되리란 걸 소문으로 알고 있지만, 내겐 터널의 끝과 시작 같은 두 개의 장소만이 존재한다." (123쪽)

▲ <서울을 떠나지 않는 까닭>

'포도밭에서 너처럼 목이 말라'의 첫 문단은 차라리 시(詩)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나는 밤으로 가고 있고, 너는 한낮에 남아 있다. 나는 내일로 돌아가고, 너는 어제인 오늘에 그대로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고, 너는 거기 남아 북쪽으로 헤매는지 모른다. 그래놓고 우리는 화개에서 만나자, 만나기로 약속했다." (217쪽)

임수현은 단편소설이야말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장르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굳이 장편소설의 기승전결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이번 소설들에는 일반적인 서사가 없다. 차라리 어떤 스타일이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스타일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구름, 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오늘은 책상을 구름, 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아. 구름의 얼룩이 창을 지나 내 가슴까지 들어찼다. 아마 구름은 내 정수리를 지나 방 깊이깊이 드리웠을 것이다. 노란 비를 뿌리고 삼킨 구름은 당연히 노란색이나 공간이 깊어질수록 커피색을 띤다." (11쪽, '구름의 출처' 중에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과 연애하는 것 같은 둘의 여행은 사진과 글이 어우러져 인지 이름을 지우면 그냥 같은 사람 책으로 보였다. (중략) 어쩌면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훔치지 않더라도, 사랑은 닮아가는 감정이고, 어느덧 시늉하고 있는 서로이므로. (51쪽, '서울을 떠나지 않는 까닭' 중에서)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던 지난가을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머뭇머뭇 신중하게 말을 하는 이였던 것 같다. 말은 생각이고, 생각은 곧 문장일 테다.

문학수첩, 320쪽, 1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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