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미술읽기 강좌 - 김만석 평론가가 말하는 '조양규'화백
1950년대 풍미한 재일작가
비정상적 노동사회 비판
지역미술사엔 기록 미미

▲ 1950년대 일본 화단의 중추였던 리얼리즘 작가 조양규. /김민지 기자

1950년대 일본 화단의 중추였던 리얼리즘 작가 조양규(1928~?). 그는 이우환과 함께 일본 회화사를 바꾼 재일작가로 손꼽히지만 정작 그가 나고 자란 고향 경남에선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진주시사에 '월북' 작가로 단 한 번 등장할 뿐이다.

지난 17일 진주미술읽기 강좌에서 김만석 미술평론가는 "조양규는 진주미술사에 오랫동안 공백으로 남았다"며 "남로당 활동 중 탄압을 피해 진주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그를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강좌는 한국작가회의 주최, 진주문고·삐삐책방·소소책방 주관으로, 카페 수류헌에서 열렸다.

◇전후 일본미술사의 중요한 인물 = 조양규는 합천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자랐다. 그는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 남로당 활동에 참여한다. 그가 좌익 운동에 몸담았던 이유는 존경하는 선배, 존경할 만한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조양규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 고향에서 쫓겨나듯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도쿄 에다가와 조선인 마을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했다. 부두 창고에서 일한 경험은 그의 작품의 모태가 됐고 일본 화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50년대 일본의 지배적인 화단은 현실과 생활을 '추상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조양규는 현실과 생활을 거칠고 날카롭게 그렸다. 창고와 맨홀 연작이 그것이다.

김 평론가는 "조양규의 작업은 당대 일본 화단의 분위기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 화단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며 "이 시기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경제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고 현실을 지워버리는 방식의 화풍이 압도적이었지만 조양규는 그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일본 사회의 현실을 대면했다"고 말했다.

조양규는 북조선 귀국운동(북송사업)이 시작되자 1960년 북한으로 건너갔다. 북한 공식 미술잡지 <조선미술>에 1967년 2월까지 글을 싣다가 이후 소식이 끊겼다.

◇진주지역 미술 아카이브 필요 = 김 평론가는 진주미술사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재난'이라고 했다.

그는 "진주지역에서 초토화는 크게 두 번 일어나는데 정유재란과 한국전쟁이다"며 "진주지역 문화예술 활동은 초토화 이후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진주미술사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슬로건은 재생과 재건, 부활과 동시에 망각이다"며 "그 중심에 조양규와 설창수가 있다"고 말했다. 설창수(1912~1998)는 개천예술제 창시자다.

그는 이번 강좌를 준비하며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진주미술사를 정리했다. 그는 그 외 공백은 지역사회의 몫이라고 했다.

김 평론가는 "인근 마산만 해도 미술사 자료가 풍부한데 진주는 너무 없다"며 "지역의 중요한 자산을 아카이브해야 하고 자료가 수집되고 누적되면 그것을 재해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진주지역 미술인에 대한 재평가도 주문했다.

김 평론가는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양화로 변신을 꾀한 박생광, 촉석루의 화가로 불리는 조영제 등 서양화 1세대에 대해 재검토를 해봐야 할 시점"이라며 "지역문화론을 처음 제시한 설창수 선생에 대한 평가도 다음 시간에 한 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 진주미술읽기는 5월 초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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