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치 대신 성냥으로 불 피울 생각 못했다
가끔 과학기술서 벗어나 '지혜'살려보자

몇 년 전 미국에서 캠핑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가스 토치를 준비하지 못해서 나무 장작에 불을 피우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가족에게 근사한 캠프파이어를 약속했던 필자는 하는 수 없이 이웃 캠핑 가족을 찾아가, 가스 토치가 있냐고 물었었다. 두 아들과 함께 캠핑을 온 이웃의 아빠는 토치는 없다면서 내게 '성냥' 한 통을 내밀었다. 성냥으로 나무 장작에 불을 피우라는 것이었다.

성냥으로 장작에 불을 피우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던 필자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침 보이스카우트를 했다는 중학생 정도의 그 집 막내 아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도끼로 장작 하나를 가늘게 쪼개었다. 성냥 한 개비로 신문지에 불을 붙여 잘게 쪼갠 장작에 불을 지폈다. 어느 정도 불이 타오르자 큰 장작을 넣어서 제대로 된 장작불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에게 '생큐'를 연발하면서 필자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항상 가스 토치를 이용해 불을 피웠던 필자는 토치가 없으면 장작에 불을 피울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성냥보다 더 좋은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고, 얼마든지 장작에 불을 피울 수 있었는데 그 방법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의 뜨거운 열기만큼 필자의 얼굴도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렸다.

필자는 왜 토치 대신 라이터로 불을 피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자동차·휴대폰·가전제품과 같은 많은 문명의 이기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문명을 사용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고, 과학기술에 많이 의존하면서 살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인간이 가진 지혜나 습성을 점점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마치, 필자가 가스 토치의 편리함에 젖어, 성냥이나 라이터의 사용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이 외에도 과학기술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인간 본연의 능력·관계·감성 등이 약화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보편화하면서 길을 찾는 공간 지각능력이 퇴화하는 기분,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여 사용하다 보니 가까운 사람의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것, 인터넷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과격한 뉴스에 판단력을 잃고 쉽게 흥분하는 것 등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일이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배워왔다. 인간이 없으면 과학기술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고, 우리는 과학기술을 충분히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앞선 사례에서 보듯 과학기술 때문에 공간지각능력·암기력·마음·관계·손재주 등 인간의 본성은 퇴화하고, 오히려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어쩌면 과학기술이 없으면 인간이 생존할 수 없다는 불안감마저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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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과학기술의 영향에서 벗어난 '탈기술' 상태에서 온전히 살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편리함을 거부하고,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이미 공기와 같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함에도 가끔은 과학기술의 이기에서 벗어나 보는 것은 어떨까? 가스 토치 대신 성냥의 사용법을 배우듯이 불편함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와 재발견, 느림에서 얻는 여유로움과 재충전, 인간 대면에서 얻는 정서안정과 관계회복 등 탈기술은 과학기술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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