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에 조선침탈 주도자 싣는 일본 괘씸
우리지역 화폐에 새겨 마땅한 인물 있나

일본 정부가 곧 바꾼다는 엔화의 화폐 인물이 입방아에 올랐다. 1만 엔 전면에 등장할 인물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일제가 조선을 침탈할 때 금융 분야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부사와는 일제 강점이 이뤄지기 전 대한제국 시절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된 지폐 도안의 주인공이었다. 근대적 금융 시스템에 무지했던 대한제국이 일본 금융당국의 공세에 휘둘린 결과였다. 그 시부사와 초상을 21세기에 다시 봐야 한다니!

그밖에 5000엔은 일본의 명문사립여대 쓰다주쿠대학 설립자인 쓰다 우메코이고 1000엔은 일본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로 확정됐다. 모두 메이지유신 시대의 중요 인물들이다.

왜 일본은 이토록 메이지 시대 인물들에 집착할까? 현대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아시아에서 절대 강자로 급성장했고, 세계적으로도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제법 대등하게 힘을 겨뤘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스스로 가장 힘셀 때를 기억하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나 이웃 국가들에 안긴 고통에는 무심한 태도는 여간 괘씸하지가 않다.

미국도 내년이면 일부 달러의 표지인물과 디자인을 바꾼다. 미국의 화폐인물 논란은 2015년부터 사회적인 의제로 부상했다.

1달러부터 100달러까지 등장인물 모두가 백인 남성인데, 과연 문화와 인종의 용광로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정체성에 부합하느냐는 이의제기가 힘을 받았다.

1년여의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 2016년 미국 화폐 당국은 20달러에 노예제 찬성 발언으로 논란이 있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뒷면으로 돌리고 노예 출신의 여성 흑인인권운동가인 해리언 터브먼을 새겨넣기로 했다. 또 다른 교체 대상이었던 10달러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앞면 인물로 유지하는 대신 뒷면에 여성참정권 운동가 5명의 초상을 그려 넣기로 했고, 5달러에도 뒷면에 마틴 루서 킹 등 인권운동가들의 초상을 모시기로 했다. 오늘날 미국이 초창기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신분의 영웅들이 헌신해 만든 나라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 화폐인물은? 명색이 '민국'인데 죄다 조선시대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왕, 한 사람은 장군, 두 사람은 유학자, 심지어 가장 최근에 채택된 인물은 현모양처의 롤모델인 5000원권 유학자의 어머니다. 신분으로 보면 왕족과 양반으로 조선 시대 초엘리트 지배층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다.

이분들 면면이야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과연 민주공화국을 상징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왕과 사대부가 지배층을 이루며 권력투쟁을 벌였던 조선왕조의 가치와 주권재민의 대한민국 가치가 과연 병립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상상. 만약 경남에서 지역화폐 인물을 선정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주인공이 될까? 힌트가 될 만한 인물이 있다. 경상남도의 2019년 문화예술 업무계획에 따르면 도문화정책의 주요 성과 중 하나로 '남명사상의 시대정신 확산 노력'을 꼽고 있다.

경남도의회는 2018년 1월에 '선비문화 진흥조례'를 제정했고, 경남도는 같은 해 12월 '남명 선비문화 계승발전 실행계획'을 수립했다. 올해 정책목표의 5대 이행과제에도 '선비문화 진흥'이 이름을 올렸다. 이 정도로 도문화정책이 챙기는 인물이라면, 화폐의 주인공 후보로는 영순위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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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질문이 꼬리를 문다. 조선의 사대부 남명은 민주공화국에서 자치를 지향하는 경상남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적합한가? 이른바 '선비문화'라는 것이 과연 21세기의 '경남정신'으로 마땅한가? 우리도 미국 사례처럼 사회적인 토론 과정을 거친다면, 과연 500년 전 유학자를 대표 인물로 삼을 수 있을까? 최근 화폐인물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우리 지역사회에 던져보는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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