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숨 들이켜면 드러나는 검은 보물
물 빠진 갯벌의 멋 가득
때 기다릴 줄 아는 배와
세상 번잡함 씻는 너른 품
선물처럼 만난 노을까지

▲ 종포마을 앞 갯벌, 저 너머 사천대교가 보인다. /이서후 기자
사천에 이렇게 멋진 해안도로가 있었다니! 얼마전 경남연극제 취재로 삼천포 방향으로 가다 이끌리듯 접어든 사천 바닷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는 온통 갯벌이었습니다. 해가 뉘엿거리는 시간, 사천공항에서 시작해 사천대교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를 달리며 놀라운 색감과 아스라한 풍경에 정신이 아찔했지요. 알고 보니 여기가 바로 사천만이었더군요.

▲ 산업단지 조성으로 일부가 사라졌지만, 사천만갯벌은 여전히 멋지다. /이서후 기자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김훤주 대표가 쓴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피플파워, 2018)란 책에 사천만 갯벌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천은 드넓은 갯벌의 고장이다. 경남 갯벌의 절반이 사천에 있다 해도 틀리지 않다. 물론 사천만의 동쪽 부분인 사천읍, 사남면, 용현면 일대 갯벌이 매립되어 산업단지가 되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광포만까지 포함하여 사천만의 서쪽 부분은 대부분 그래도 살아 있다. 동쪽 또한 다치기는 했어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선진리 주문리 갯가는 이른바 실안 노을길에서 가장 빛나는 길목이다." (18쪽)

제가 달린 도로는 사천만의 동쪽 해안도로입니다. 지도를 보니 해안산업로라 하는군요. 산업단지 지역이라 사람 한두 명 지날 뿐 인적이 거의 없습니다. 산업단지에는 항공 관련 기업이 많은 것 같군요. 산업단지가 생기기 전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이곳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갯벌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즐겁습니다.

물 빠진 갯벌 위에 덩그러니 배 한 척이 서 있습니다. 밀물이 들어와야 바다로 나갈 수 있겠지요. 묵묵한 기다림이야말로 사천만을 오가는 배들의 덕목이겠습니다. 그리고 갯벌 위 사람들, 아마도 조개를 줍는 것이겠습니다. 이들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져야 갯벌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 썰물에서 밀물 사이, 그 바지런한 움직임은 또한 이곳 주민들의 덕목이겠지요.

산업단지가 끝나는 부분에 선진공원이 있고 그 안에 선진리성이 있습니다. 왼쪽은 산업단지, 오른쪽은 갯벌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다 갑자기 낮은 둔덕을 만나니 반갑기까지 합니다.

▲ 선진리성에 있는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비. /이서후 기자

◇왜성을 거닐며

선진리성은 모양이 좀 독특하다 싶었는데 일본식 성이네요.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쳐들어온 왜군들의 거점이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어느 도시에서 본 성 모양과 비슷합니다. 우람하고 높은 건물만 있으면 영락없이 일본에서 봤던 성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런 건물을 덴슈카쿠(天守閣)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읽으면 천수각입니다. 선진리성에도 천수각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역설적이게도 꽤 유명한 관광지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근래 들어 복원한 성문 외에 선진리성 내부에 일본 느낌이 나는 것은 없습니다. 굳이 찾는다면 성 내부를 가득 채운 수령 오랜 벚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선진리성 벚나무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 주둔하던 왜장의 후손이 성을 사들여 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때가 일제강점기였지요. 지금은 이 비석 자리에 임무 수행 중 순국한 공군 장병을 기리는 충령비가 있습니다. 검은색 충령비를 마주 보고 선 하얀 색 비석은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비입니다. 사천만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처음 거북선을 이끌고 출전해 왜선 12척을 물리친 곳입니다. 첫 승리였죠.

선진리성을 지나 해안을 따라 계속 달립니다. 여기서 최근에 만들어진 종포일반산업단지까지는 시골 풍경이라 제법 숨통이 트입니다. 바다 방향으로 갯벌은 여전히 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넓습니다. 그 반대쪽으로 들판이 시원합니다. 이 근처 바다 앞에 딱 버티고 선 조그만 섬이 죽도입니다. 왜 죽도인지는 보시면 바로 알게 됩니다. 섬 전체가 대나무로 덮여 있거든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덕에 풍채가 아주 멋진 섬입니다.

곧 종포산업단지로 들어섭니다. 큰길을 버리고 바닷가 도로를 따릅니다. 종포산업단지 끝에서 숨은 해변을 만납니다. 해안이 온통 하얀 조개껍데기로 가득한 이곳은 좀처럼 사람이 찾지 않을 것 같아서 쓸쓸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번잡해지면 문득 찾아와야 할 것 같은 곳이네요. 아스팔트 도로는 여기까지입니다.

▲ 밀물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사천만에 있는 배들의 덕목이 아닐까. /이서후 기자

◇갯벌을 따라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언덕을 넘습니다. 그러고는 종포마을입니다. 갯벌 대신 소나무들이 바람으로 파도소리를 내는 곳입니다. 마을 앞으로 여지없이 펼쳐진 갯벌, 그 너머 꿈처럼 사천대교가 가로로 긴 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 사천대교까지는 호젓한 갯벌탐방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다 반대편으로 너른 들판이라 달리는 기분도 좋습니다. 들판 너머로 불쑥 솟은 게 와룡산인 듯합니다. 그 아래 사천시청이 보입니다. 이 도로에는 곳곳에 아기자기한 쉼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건축 양식이 제각각이라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기분 좋게 달리다 갯벌탐방시설(부장교)을 만납니다. 갯벌 깊숙한 곳까지 걸어서 갈 수 있게 해 놓은 다리입니다. 다리를 따라 갯벌 위로 작은 배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습니다.

사천대교는 가까이서 보니 제법 멋집니다. 단순하면서도 든든한 느낌입니다. 사천대교를 지나면 그제야 바다가 출렁이며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삼천포 각산에 이르기 전까지 갯벌이 악착같이 해변을 따라 이어집니다.

드라이브의 마무리는 노을입니다. 이 도로의 끝은 노을로 유명한 실안 지역입니다. 하지만, 사천만 노을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바다가 아닌 갯벌에 드리우는 노을, 그 반짝임에 눈빛이 더없이 아득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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