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 보호해야 한다면서 사형제는 찬성?
생명권 보호 아닌 '징벌'에만 무게둔 것

'재생산권리센터'(www.worldabortionlaws.com/map)라는 단체는 세계를 낙태가 ①자유로운 나라 ②상당히 자유로운 나라 ③제한된 나라 ④매우 제한된 나라로 나누고 있다. 이 순번은 여성 인권 국가 순위와도 대개 일치한다. ③인 대한민국은 여성 인권 수준도 그런 정도이다. 아니 중국이나 북조선처럼 한국보다 인권이 더 나을 것 없는 나라들도 낙태에 관한 한 ①을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여성들의 20%는 ④에 살고 있다고 한다.

유럽은 폴란드와 북아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② 이상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④였던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통해 ①이 되었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는 그동안 낙태에도 엄격했다. 여성 목숨이 위험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금했다. 1992년 14살 여성 X가 이웃집 남자한테 성폭력을 당하고 임신하는 일이 일어났다. X의 부모가 ②번인 영국으로 '낙태여행'을 가려고 하자 당시 법무부장관은 출국을 금지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X를 영국에 보내라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끓고 나서야 정부와 법원은 물러섰다. 성폭행 피해자를 두 번이나 죽음이나 다름없는 지경으로 내몰았던 이 어이없는 사건은 아일랜드가 한국 같은 ③이기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낙태 제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함을 곧잘 내세운다. 이들의 사고 속에서 태아의 생명권은 여성의 권리와 대치된다. 태아와 여성의 대립각은 여성보다 훨씬 더한 약자를 부각함으로써 낙태 제한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경우 여성의 인권을 부각한다면 약자의 생명권 박탈을 무릅쓰고 이득을 얻으려는 이기심으로 내몰리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낙태 문제는 생명권과 여성 권리의 대립으로 설정될 수 없다. 생명권을 내세우는 사람은 태아의 생명이 독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태아는 여성의 몸과 떨어져서는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 낙태 반대 논리의 근거인 태아의 생명권을 부각할수록 태아가 여성의 몸에 철저히 종속적인 상태임을 드러낼 뿐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 자신의 몸에 완전히 의지하는 존재에 대한 권리는 여성 자신일 수밖에 없다. 자기결정권은 가장 기초적인 인권이다. 그러니 여성에게 원치 않는 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낙태 제한은 성차별적이기까지 하다. 낙태 제한은 여성의 몸에만 제약이 가해질 뿐 무언가 한 일이 있었던 남자의 책임은 전혀 묻지 않으며 남자의 몸에 어떤 제약도 가하지 못한다. 한쪽의 성에게만 불이익이 가해지는 일은 애초에 도입되지 말았어야 했다.

낙태 규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님은,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이 곧 사형제 찬성자와 일치하는 경향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③이나 ④의 나라들인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 등은 대부분 사형제 유지 국가와도 겹친다.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살아있는 목숨의 값어치는 더 높게 매겨야 정상적인 사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낙태 제한과 사형제 모두 징벌이나 인권 침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형이 범죄에 대한 극단적인 징벌이듯, 낙태 규제는 출산으로서 책임지지 않는 여성의 성적 자유로움에 대한 사회적 징벌의 의미가 있다. 또 사형제를 통한 생명권 박탈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낙태 규제가 가하는 여성인권의 박탈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낙태 규제는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의 생명권에 관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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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에서 줄곧 낙태라는 말을 썼다. 말은 사회 현실을 만드는 힘이 있다. 낙태라는 부정적인 용어는 '임신 중단'으로 고쳐야 한다. 오늘은 헌법재판소에서 중대한 결정이 나오는 날이다. 헌재가 임신 중단을 생명권과 여성 권리가 맞서는 문제로 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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