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터널 수로의 다른 운명

◇1927년 동아일보에 보도된 대산수리조합

창원시 동읍·대산면과 김해시 진영읍 일대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의 근대농업유산을 찾는 과정(관련 기사 3월 8일 자 15면, 11·12·13·18일 자 7면, 19일 자 15면 보도)에서 1920년대 초반 천수답과 생땅·밭을 논으로 바꾸는 개답(開沓) 과정을 담은 당시 신문기사가 찾아졌고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수리시설을 여럿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1927년 9월 7일 자 5면 전체에 '전조선수리조합실황답사기(全朝鮮水利組合實況踏査記)'라는 제목으로 충북 연제(蓮堤)수리조합과 경남 대산수리조합을 다루었다. 전체 12단 가운데 아래 2단만 광고로 깔고 나머지 10단을 모두 털었다.

절반가량이 대산수리조합 관련으로 '물가 폭등도 불구하고 대전 직후에 설립-산업 증식을 전제로 당국이 장려'라는 제목 아래 '연혁 대요', '지세(地勢)와 목적', '관개 설비', '방수 설비', '대규모의 배수', '민족별 토지 소유와 지주' 등을 다루었다.

여기서 근대건축물 관련 부분은 관개 설비에서 용수 간선이 먼저 꼽힌다. "동면 본포리 낙동강 경계 수면에서 매초 99입방척(≒3.7톤)씩 28척을 양수하여 제방의 안쪽에 나란히 흘린다. 360칸(1칸≒1.8m)을 지나 산기슭에 이르러 제1호수도(隧道=터널)(26칸)·제2호수도(20칸)를 통과한다."

▲ 1927년 9월 7일 자 동아일보 5면 기사.

◇양수로에 낸 40m짜리 터널 두 개

본포양수장에서 대산평야로 가는 수로에 터널을 두 개 만들었다는 말이다. 기사를 보고 확인했더니 제1호 터널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제2호 터널은 최근에 도로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멸실되고 없었다.

제1호수도는 양수장에서 대산북로를 따라 동쪽으로 900m 정도 동읍 본포리 산 79-3지점에 있다. 겉모양이 길쭉하게 네모로 다듬은 석재로 보기 좋게 마감되어 있는데 높이는 3m 안팎, 너비는 5m 정도였다.

입구 1m 남짓은 콘크리트가 발라져 있었으며 안쪽도 그런지 여부는 어두컴컴해서 확인하기 어려웠다. 물이 빠져나가는 뒤쪽 출구도 콘크리트로 처리되어 있는데 가운데 기둥이 세워져 있고 양쪽 벽에는 홈이 파여 있는 것 같았다. 앞에 새로 만든 콘크리트 구조물과 철제 수문이 들어서 있어서 전체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길이는 동아일보 당시 보도와 거의 같은 45m가량으로 짐작되었다.

제2호수도가 있던 자리는 제1호수도에서 대산북로를 따라 660m 남짓 동쪽에 있다. 노연리 722-9 언저리로 대산북로가 60호 국가지원지방도와 마주치는 옥정교차로 구간이다. 그런데 도로를 확장하면서 터널을 없애고 새 수로를 내었다.

한국농어촌공사 창원지사 지역개발부 박종화 수자원팀장은 "1927년 동아일보 기사 그대로 제2호수도가 있었다. 바위를 뚫고 만들었는데 석재로 겉면을 마감한 것은 제1호수도와 똑같았다. 이번에 도로공사를 하면서 없어진 모양이다"고 말했다.

▲ 수로에 설치되어 있는 제1호 수도. 수도(遂道)는 터널을 뜻하는 일본식 표현이다. /김훤주 기자

◇낙동강 배수 간선에는 배수문

당시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제2호수도는 본포양수장에서 시작된 수로가 간선과 지선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다. 간선은 "직행하여 갈전·일동리의 남단과 모산리의 중앙을 통과하여 북부·유등리의 남방에 나와 배수 간선을 가로질러 제8호 제방 앞에서 멈춘다." 지금 보자면 대산북로를 따라 남동쪽 들판 한가운데로 가는 것이다.

지선에 대해서는 "일동리와 모산리에는 창원-수산간 도로의 오른편을 따라 제2호터널 입구에 제수문·방수로를 설치하여 조절을 가능하게 했다"고 했다. 지금 보자면 국지도 60호를 끼고 조금씩 휘어지면서 동진하는 것이다.

터널 수로 말고도 근대건축물이 더 있었다. 단서는 배수 설비 부분에 있었다. 먼저 간선은 "우산리(牛山里=矛山里의 오자) 남단을 통과하고 동쪽 끝에 이르러 왼쪽으로 꺾어져 북쪽으로 가면서 유등리에 이른다. 수도 길이 20칸2푼을 천착(穿鑿)하여 유등리 □문(□門)으로 낙동강 본류에 방출하도록 한다."

이어서 "최대 너비(大幅) 9척 높이 10척에 2짝인데 입구에는 파양(播揚)문짝을 토구(吐口)에는 자□(自□) 문짝을 달아 낙동강의 역류를 방비한다"고 했다. '파양'과 '자□' 모두 낙동강 쪽에서는 절로 닫히고 제방 쪽에서는 절로 열리는 장치로 짐작된다.

해당 지점(대산면 유등리 183-2)에는 유등중앙배수문이 있다. 입구 수문은 바뀌어져 있었지만 토구 수문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두 개가 있는데 높이는 3~3.5m, 너비는 3.5m 정도로 짐작되었다. 거기 달린 철제 대문은 '역류 방비'를 위해서인 듯 낙동강에서 물이 밀려들면 그 수압으로 닫히도록 되어 있었다.

입구와 출구는 상하좌우 모두 콘크리트가 입혀져 있었고 대신 가운데 30m가량은 옛날에 뚫은 천연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철문의 위쪽은 석재가 평면으로 되어 있었지만 철문과 철문 사이와 양쪽 가장자리는 원형을 이루며 앞으로 나와 있었다. 오른쪽 석재에는 수위를 재는 눈금이 새겨져 있었고 바닥도 문턱 부분은 콘크리트가 아닌 석재로 마감되어 있었다.

현장 안내판에 준공 연도가 1920년으로 되어 있었다. 관리기관인 진영국토관리소는 이에 대해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배수문이 있는 대산제방의 최종 준공이 1936년으로 되어 있고 시설물은 1920~30년대에 축조됐다는 사실을 참조했다"고 밝혔다.

▲ 낙동강으로 빠져나가는 배수간선의 마지막 유등중앙배수문. /김훤주 기자

◇주천강 배수 지선에는 개착통로

동아일보에는 배수 지선도 나온다. "우암리(牛岩里) 동쪽 지소(池沼)를 기점으로 새로 개착(開鑿)하여 제9호 제방 남단에 너비 4척에 두 짝으로 입구에 파양개□(開□), 출구에 초호(招戶)를 설치해 역류를 방지하고 낙동강 지류 주천에 방수한다"는 것이다.

기사에 '우암배수로'라 적혀 있는데 해당 부분은 대산면 유등리 434-12 동곡양배수장 앞 수로에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창원지사 박종화 팀장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배수 시설인데 지금은 물을 모으려고 가두는 중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이처럼 동아일보 당시 보도를 바탕으로 찾아낸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물은 제1호·제2호 수도, 유등중앙배수문과 동곡배수장 앞 개착 부분 4개였다. 이 가운데 제2호수도는 최근 들어 도로 공사로 멸실되고 말았다.

▲ 유등중앙배수문 통로 한가운데 부분. 천연암반에 구멍을 뚫은 울퉁불퉁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김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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