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끼고 어울리며 살아온 기억의 창고
팽팽하기만 한 얼굴들의 나라 곳곳 삐걱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아내가 영감님이라며 놀립니다. 코와 입가의 팔자 주름이 두드러지고 이마엔 굵은 주름이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 보이고 어둡고 지친 듯한 인상이 보기 싫다며 보톡스 시술을 권합니다. 나이 사십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십도 훌쩍 넘어선 지금 나 스스로 만들어 기록한 모습을 굳이 바꾼다고 사람이 바뀌랴 싶어 아서라 말아라 했습니다.

주름살은 햇빛을 비롯해 안팎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 피부 노화가 진행하면서 콜라겐과 탄력 섬유가 줄어 생긴다고 합니다. 가는 세월에 저절로 생긴 주름살도 있지만 타고난 성정과 살아온 흔적으로 새긴 깊고 굵은 주름이 또 있지요. 얼굴 특정 부위의 표정 근육을 많이 사용하여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주름으로 어린 시절에는 표정을 지을 때만 생겼다 없어지지만 계속 같은 표정을 지으면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 새겨지게 되지요.

그렇게 새겨진 이 표정 주름으로 그 사람의 성격이나 됨됨이를 알 수 있답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늘 화가 나있는 사람은 두 눈썹 사이에 세로로 두세 줄의 깊은 주름이 뚜렷합니다. 긍정적이고 잘 웃는 사람은 눈가에 많은 주름이 잡히겠죠. 남을 억누르고 제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콧잔등 주름이 생길 거고요. 호기심과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눈이나 눈썹을 많이 움직여 이마 주름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주름은 삶의 기록이고 기억 창고입니다. 할머니 생신날 어린 손녀가 무릎에 안겨 할머니 주름살이 슬퍼 보이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듯해서 걱정이시냐고 묻습니다. "전혀 걱정되지 않아. 이 주름살 속에 내 모든 기억이 담겨 있거든." 호기심 많은 손녀는 할머니 주름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여기엔 뭐가 담겨 있냐고 또 물어봅니다. 할머니는 수수께끼를 풀었던 이른 봄 그 아침의 희열과 사춘기 소녀 시절 최고의 바닷가 소풍을 찾아냅니다. 할아버지를 만났던 날의 설렘과 짜릿함, 여동생한테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던 때 기쁨과 처음으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던 때의 슬픔을 떠올리고 손녀가 태어나 처음 만났던 환희를 기억합니다.

이탈리아 동화 작가 시모나 치라올로가 쓴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라는 아이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의 살아온 삶이 새겨진 그 주름은 할머니만 지닌 숨기거나 지울 수 없는 주름입니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냐고 묻던 고집쟁이 농부의 주름에서는 그가 일군 흙내와 풀내를 숨길 수 없습니다. 갑질의 성채에 망치를 휘두르는 늙은 노동자의 땀방울 맺힌 이마 주름에서는 쇳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올해 예순여덟 자신 동네 장머리 어물전 용띠 아지매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대통령하고 갑장이라는데 산전수전 겪은 주름이 자글자글합니다. 아지매는 창조 경제는 몰라도 시장 바닥 돌아가는 형편에는 훤했지요. 흙내 풀내 풍기던 그 농부님도 고시 합격은 못했지만 흙을 살리고 우리 종자 망태기를 지키고 더불어 잘 사는 지혜가 넘치는 분이셨죠.

이마에 소금땀 맺혀본 적 없고 주름 하나 없는 책상물림 샌님들이 나라를 다스리니 곳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고작 오만한 벽창호가 새긴 미간의 세로 주름이 안하무인으로 날뛰고 잠시 맡긴 권한으로 주인을 물고 할퀴려는 고양이 콧잔등 같은 천한 주름이 활개를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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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울리고 더불어 부대끼며 사는 기억을 담은 주름이 없는 팽팽하고 하얀 얼굴로는 사람들을 이끌고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따뜻하고 좋은 기억이 많이 담긴 주름 멋진 얼굴이 문득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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