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독립운동연구소 전수조사
백산무역 통한 자금 조달 등
당시 언론보도·관련 문헌 확보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14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배달학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에서 총무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하동 출신 황남 문영빈(1891∼1961·북천면) 선생을 임시정부 수립 100년 만에 재조명하고 서훈을 추진한다.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해 3월부터 관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추진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시영·여운형 등과 활약한 문영빈 선생의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확인했다고 9일 밝혔다.

이번에 문건을 발굴·확인한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당시 언론보도와 선생의 손자 문여황 경남과학기술대 교수가 제공한 자료 등에서 선생의 활약상과 백산무역㈜을 통한 독립자금 지원, 한용운 선생이 결성한 만당에서 항일운동 등을 확인했다.

문건에 따르면 문영빈 선생은 1914년 24세에 하동에서 김홍권(양보면·건국훈장), 강한조 선생과 함께 처자를 거느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은 1915년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배달학회(상해 임시정부 전신)를 조직하고 명예회장에 이시영, 외교부장에 여운형, 총무부장직은 선생이 맡았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과 함께 총무처 대변인에 피선됐으나,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자금정조책을 수립·계획하고 환국했다.

▲ 하동 출신 독립운동가 문영빈 선생 생전 모습. /하동군

선생은 북천면 직전리에 있던 전답 1000여 두락을 한성은행에 담보해 자금을 마련하고 안희제 등과 함께 백산무역을 설립, 주식 500주를 소유한 대주주로 참여하며 초대 상임 감사역을 맡아 독립운동에 힘썼다. 백산상회는 독립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한 회사로, 투자자는 경주의 '최 부자'로 유명한 최준, 안희제(의령), 윤현태(양산), 문영빈, 정재완(하동) 등이었다.

선생은 안희제와 함께 지하공작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수색·감금 등 집요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백산상회는 1927년 문 닫았다.

이어 1929년 불교계 항일 지도자 한용운이 결성한 만당의 비밀결사에 참여해 김범부, 이기주, 김법린, 최범술과 함께 사천시 곤명면의 다솔사를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에 재정 지원을 전폭적으로 했다.

또한 선생과 친교가 두터웠던 이승만이 해방 직후 생가를 찾아와 '나라를 세울 테니 학무행정(현 교육부 장관)을 맡아 달라'고 청했으나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하기도 했다.

선생은 분단된 조국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걱정하면서 1961년 71세에 생을 마쳤다.

손자 문여황 교수는 "조부께서는 업적을 드러내기 꺼리셨다"며 "공을 멀리한 삶에 오히려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조부가 타계한지 60년의 세월이 흘렀고 의로운 행적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독립운동 재조명에 함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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