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천왕-불이 3개 문 구조 '쉽지 않은 깨달음의 길'상징

이번에는 사찰의 문을 살펴보자. 궁궐은 유교적 이상향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지만 사찰은 불교가 바라보는 세상의 틀인 수미산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세상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있고 중턱에 사천왕이 있다. 당연히 정상은 고귀한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불교 사찰은 세상의 중심에 있는 부처님 혹은 진리를 찾으러 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당연히 이 길에는 문이 있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사찰도 궁궐처럼 3개의 문을 거쳐야 중심에 닿는다. 일상생활과는 다른 특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적어도 하나의 문은 필요하다. 그 특별함을 강조하려면 하나는 좀 약하다. 일반 집도 하나씩 문은 만드니 개수를 더할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면 몇 개를 더해야 할까?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짝수보다는 홀수를 선호해서 개수가 1, 3, 5의 순서로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남는 것은 3이냐 5이냐의 문제일 텐데 경제적인 이유로 웬만하면 3개로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탑을 만들어도 대부분 3층이었고, 궁궐을 만들어도 황제나 5개의 문을 만들 수 있었지 왕들은 3개로 제한했을 것이다.

▲ 경북 영주시 부석사 안양문의 좁은 문을 기어올라와 무량수전을 보고 뒤돌아서면 지나온 괴로운 길은 어느새 극락이 되어 안양루라고 말하는 모습이다. /최형균

◇일주문(一柱門)

사찰을 찾아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문은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바로 거기서부터 일상과는 다른 공간이 시작됨을 알린다. 그래서 그 외형부터 남다르다. 기둥(柱)이 하나(一)인 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건물이다. 사실 이런 건물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구조다. 건물의 기본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인데 한 줄의 기둥으로는 공간을 만들 수가 없다. 그리고 넘어질 위험도 크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게 일주문의 역할이다. 이런 취지에 가장 정확하게 들어맞는 예를 부산 범어사에서 찾을 수 있다.

범어사 일주문은 정면 3칸 건물이다. 기둥이 네 개 있다는 말이고 이 네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일주문이다 보니 남다른 구조들을 많이 이용했다. 광화문에서 본 것처럼 일주문의 격을 높이려고 범어사도 기단인지 기둥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듬직한 돌 구조물 위에 건물을 올렸다. 그리고 화려한 다포가 지붕을 받친다. 이 문 뒤에 있는 곳은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건축요소만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은 후 혹시 지나가는 절에서 아무리 문의 이름을 찾아봐도 일주문이라는 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 만나게 되는 문이다 보니 일주문에는 주로 절의 이름을 써 넣는다. 이때 주로 절이 있는 산의 이름도 같이 적는다. 혹은 자랑하고 싶은 내용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범어사 일주문에는 '금정산범어사',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편액이 같이 걸려 있다. 선종 사찰 중 중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일주문에서 일주문을 찾지는 마시라.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은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갑옷을 입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신상 네 개가 있는 곳이 천왕문이다. 사천왕이 있는 문이라서 사천왕문이라고 해야 할 수도 있으나 천왕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네 글자보다는 세 글자를 선호한 결과일 것이다. 일상생활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축의금 봉투에 4만 원이 보이면 여러 사람이 당황하게 된다.

사천왕들은 대부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섭게 위협하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여기를 지나가기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종종 보인다. 필자도 그랬었는지 어머니는 어릴 적 사천왕을 보고 전생에 사람들을 괴롭히던 몹쓸 존재들을 벌하는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사천왕은 무섭게 생겨야 했는지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은 한가지일 것이다. 이 문을 지나는 자! 마음과 행실을 똑바로 할지어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춘천 청평사 회전문(廻轉門)에는 사천왕상이 없다. 일반인들은 일단 이름에 꽂힌다. 문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까? 그것도 절집에? 하지만 전통 목조건물에 그런 문은 없다. 그래서 해석하기에는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설명이 안 된다. 다른 해석은 사천왕들이 인간들을 위해 세상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자리를 비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름도 열심히 뱅뱅 돌아다닌다는 회전문이라는 것이다. 편한 대로 받아들이셔도 될 듯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회전문의 명성 때문인지 소양호의 힘인지 청평사가 연인들의 주된 데이트 코스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 벚꽃까지 피어나면 이 일대는 장관을 연출한다. 지금 이 시점이다.

▲ 청평사 회전문 뒷면. 가운데 드나드는 길 좌우 공간에 마루를 깔았다.

◇불이문(不二門)

마지막 문이다. 이 문 뒤에는 부처님이 직접 계신 세계가 펼쳐진다. 둘이 아닌 문이다. 아마 진리는 하나라는 선언, 나아가 이 문을 넘어서려면 쓸데없는 분별을 다 버리고 본질에 충실하면 진리가 펼쳐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양한 이름이 붙는다. 해탈문, 자하문, 안양문 등등. 그 끝은 하나이다. 이 문 너머에는 당신이 보고 싶은 혹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펼쳐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문의 기본을 전혀 따르지 않는 불이문도 많다. 경북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를 보자. 부석사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무량수전이다. 그러면 무량수전 앞에 있는 문이 불이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야 문은 보이지 않는다. 2층짜리 커다란 누각만 하나 서 있다. 조금 가까이 가보자. 2층에는 현판에 부석사라고 쓰여 있고 1층에는 안양문(安養門)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바로 이게 문이다. 현판을 지나 2층 바닥 밑으로 일단 들어가야 한다. 어두워진다. 그제야 건너편에 빛이 나타나면서 작은 구멍 하나가 보인다. 문이라기보다는 구멍에 가깝다. 그것도 좁디좁은 구멍 하나. 게다가 올라가려니 경사도 급하고 구멍이 작아 머리를 부딪치기 십상이다. 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불이문이다.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목적만 달성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겪는 사람들은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불평을 앞세우거나, 우리의 조상은 다 난쟁이였다면서 화살을 이상한 방향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오히려 종교적 체험을 강화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기독교이든, 이슬람이든 불교이든 모두 저마다의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그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오히려 쉬운 길은 잘못된 길일 수 있다. 모든 생명체가 태어날 때도 알을 깨거나, 온몸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견디면서 좁은 산도를 뚫고 나와야 한다. 무협지에서 말하는 환골탈태도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편하게 콧바람 불면서 부처의 세계에 가겠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번쯤 머리를 숙이고 어렵게 지나가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 불이문의 본질이다.

▲ 경북 영주시 부석사 안양문의 좁은 문을 기어올라와 무량수전을 보고 뒤돌아서면 지나온 괴로운 길은 어느새 극락이 되어 안양루라고 말하는 모습이다. /최형균

다시 부석사로 가보자. 좁고 캄캄한 안양문을 통과하면 탁 트인 무량수전이 순례객을 반긴다. 안양은 극락이라는 뜻이다. 안양문을 지나면 펼쳐지는 곳은 무량수불이 지키는 극락정토의 세상(무량수전)이니 적절한 문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무량수전을 보고 한번 뒤를 돌아보라. 지나온 문이 있던 자리에는 안양루라는 현판과 멋진 정자가 나타나고, 그 뒤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최순우 선생도 무량수전을 바라보며 글을 쓴 게 아니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깨달은 바를 여러분에게 말한 것이다.

이런 절집의 문은 일반적인 문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절집의 문에는 문짝도 담장도 없다. 그냥 경계만을 확인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만 다시 잡아주고자 하는 문들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이 이런 문 앞에서 고민하는 것 같다. 가운데로 지나가도 되는 걸까? 아니면 옆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더 이상 이런 고민하지 마셨으면 한다. 헛된 분별없는 진리의 세계로 가는데 문안으로 지나갈 수 있는 사람과 그걸 피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을 보러 혹은 진리를 찾으러 가는 길에 귀천이나 자격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는 존재 앞에서 이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인가! 그래서 말한다. 당당하게 가운데로 지나가시라! 오히려 그게 올바르게 진리의 세계로 가는 방법이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