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서 언제든 대체될 내 자리…가족 안에서만큼은
 
 
 

카페를 아침 7시에 오픈한다. 커피의 본질은 카페인이다. 카페인은 깨우는 것이고, 작은 마을에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손님이 많고 적음은 나의 정성을 떠나 하루의 운이지만, 공휴일도 일찍 오픈하는 것을 지킨다. 그렇게 여는 것이 신이 나에게 준 하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오전 11시 45분까지는 무조건 혼자 일을 한다.

귀 기울여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린다. 음미할 가치가 있는 한잔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서빙을 하고, 테이블을 닦고 설거지를 하는 모든 과정을 혼자 감당한다. 인식되는 나의 책임에 대해서 충실히 복무한다. 분업하는 오후 시간보다 발바닥이 아프지만, 아침에 더 활기차게 일을 하는 편이다. 모든 시간은 나의 것이고, 고된 만큼 자긍심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 아내와 아이. /정인한

◇추출과 이타심

커피를 내리면서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추출 수율이다. 추출은 전체 속에서 어떤 요소를 뽑아내는 것을 말한다. 원두에서 뽑아야 하는 것은 원산지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맛과 향이다. 그들이 가진 풍미를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뽑아야 한다. 과하면 텁텁하고, 부족하면 밋밋하다. 적당해야 마시는 사람이 생두의 여정을 상상할 수 있고, 식어도 뒷맛이 깔끔한 커피가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손님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한잔의 커피를 만들고 다음 커피를 만드는 사이에, 그것이 정해진다. 원두 가루가 담길 곳과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은 완벽하게 깨끗해야만 한다. 이 부분은 커피를 내리는 사람만이 확인할 수 있다.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의 날도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조절을 해야 한다. 바리스타의 전문성은 여기에서 결정된다고 배웠다.

11시 45분부터는 둘이서 일한다. 그때부터 염두에 두는 것은 손님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이타심이다. 나이를 떠나서 서로 최대치의 높임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귀 기울여 들을 것, 함께 일을 하고 같이 앉을 것. 이런 것들이 내부에서 강조되는 배려의 원칙이다. 최종 감독은 스스로의 몫이지만 행하면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 같다. 그런 룰을 바닥에 깔고, 8년째 카페가 움직이고 있다. 떳떳하게 일한 날은 카페에서 얻은 피로감이 훈장 같다. 피곤함이 걷히고 맑은 얼굴로 카페를 나서는 손님들의 얼굴을 보면서, 작은 동네에 약간의 기여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임용시험

사실, 나는 한동안 시대가 나라는 존재를 필요치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식의 멜랑콜리는 IMF 사태 전후에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감상이다.

미디어로 보이는 환상과 현실의 간극은 넓어지고,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의 문은 점점 좁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셀러처럼 꿈과 열정을 가져야 할 것 같고, 노랫말처럼 방황도 해보고 싶은. 한국은 떠나야만 하는 곳이고, 외국으로 여행이라도 가야지 조금이나마 힐링이 되는 것 같은. 투자해야 돈을 버는데, 투잡을 해도 돈이 안 모이는. 세계 전체는 화려한 조화고, 낭만적인 사랑만 생화처럼 시들어버리는.

단골손님은 알겠지만, 나의 꿈은 원래 교사다. 시크릿도 읽고 명상도 즐겨 하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계속 떨어졌다. 떨어진 다음 날부터 다음 해 임용시험을 준비했는데, 낙방했다. 그것을 수차례 반복했다. 아내와 함께 살고 싶어서, 커피를 배우고 빚을 내어서 카페를 시작했다. 가게 상호 앞에는 아내의 이름이 숨겨져 있다.

어느새, 두 딸의 이름이 더 붙었다. 육아를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했다고 고백한다. 예전에는 주 6일을 일했다. 얼마를 벌든 괜찮은 남편은 아니었다. 아빠로서 존재감도 적었다.

지금도 녹초가 되어 들어간다. 그래도 들어서면 두 딸이 강아지처럼 반긴다. 우리가 정면으로 마주한 세월 덕이다. 서우와 온이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그녀가 아빠라고 연거푸 불러주어서 내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공전하는 두 딸을 보면서 나는 힘을 얻는다.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상상하기도 한다. 퇴근한 뒤에 짧은 밤은 실로 한 줌의 시간이다. 하지만, 분명히 만져진다.

▲ 같은 곳을 바라본다. /정인한

◇아빠의 자리

나는 논둑을 세우는 것처럼 아내의 마음을 다독인다. 일하면서 길러낸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말한다. 아내도 그렇게 한다.

그렇게 고쳐진 울타리 안에서 두 딸이 오늘도 울고 웃고, 지지고 볶는다. 자식 농사를 짓는다. 이런 말이 위안이 될는지 모르겠다. 사회에서 우리의 자리는 언제나 대체될 수 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아빠의 자리는 아니다. 나만의 몫이다. 내가 스스로를 배신하기 전까지, 여린 두 딸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 그것에 정면으로 응할 때, 마음에 보람과 언어가 쌓인다. 그것은 친구와 나눌 수 있는 안줏거리일 수도 있고, 일터에서 꺼내먹을 수 있는 비타민일 수도 있다.

불안한 세상에서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런대로 부모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케치북에 종종 그려지고 있고, 가끔은 어설픈 노랫말의 가사가 되기도 한다. 운이 따라주었다. 이런 딸들을 준 하늘에게 고맙다. 아내와 나는 그런 마음으로 같은 이불을 덮고 손을 잡는다.

바리스타 8년 차, 오른손이 고장 나버렸다. 아내를 잡은 손이 시큰거린다. 그래도 이제는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 요령 피우지 않고 정성을 다하고 이것을 반복하면, 입에 풀칠은 할 것 같다. 돈보다 의미가 많이 쌓였으면 한다. 그것을 갈아서 뭔가 써 내려가는 것이 삶의 낙이다.

손님이 들어온다. 우리를 필요로 하고 부른다. 혜인이 귀 기울여 주문을 받는다. 나는 샤워 스크린과 포터 필터를 체크한다. 깨끗하다. 빛이 난다. 나름의 서사를 품은 원두를 소복하게 담는다. 왼손으로 힘을 줘서 꾹 누른다. 선을 다한다. 두 손으로 부드럽게 장착한다. 그리고 직면한다.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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