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편 아니라고 무시·반발하는 정치인들
진정 나라 걱정만 하면 원수 될 일 있나

아주 오래전 들은 사연이다. 계훈제 선생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박정희 독재에 저항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 분은 해방 후 서울대 재학시절 우익의 기수였다고 한다. 당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컸다. 대표적인 진보 인사이며 운동권 대학생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이가 좌우 대립과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 죽기 살기로 싸우던 시절에 우익 쪽이었다니, 우선 믿기지 않았다.

그 말을 들려준 이는 당시 서울대의 좌익 쪽 기수였으며 백발이 성성한 그때는 반핵 운동가로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더 유명한 분이었다. 그는 일어를 잘 하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일제하에서 옥고를 치른 이재유의 공판 기록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그렇게 살기 등등했던 두 분이 둘도 없는 벗으로 지낸다는 사실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겪으면서 같은 길에 들어서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해 가끔 청진동 빈대떡 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주치는 사이라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인연이 또 있을까 싶다.

아주 오래전 들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는 보수를 상대하려 하지 않고 가진 자들은 없는 자를 무시하고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보는 정치문화 등등 두 사람의 사연을 부러워하게 만드는 모습들이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느껴지는 것은 우부의 감촉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나만 정의라고 할 때 그 오만함의 틈으로 어느덧 파멸이 턱 밑의 송곳으로 찔러 들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가 뭔가 열심히 잘 하려고 하고 이전 정권보다 선명성을 강조하는 기조는 분명히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에서 나만 옳다는 것은 약이기보다 독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해방정국에서 이념을 떠나 냉정하게 이 나라를 걱정들 했다면 원수가 될 일도 전쟁도 없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의 대변인이라고 하여 여당 의원들로부터 야유와 반발을 샀다.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문희상 국회의장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것도 민주주의라고 일갈했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산실인 국회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국회라는 곳이 얼마나 상식 이하인지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내 편이라서 좋다고 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것이다.

여당이 되고 정권을 잡은 것은 국민이 선택한 것일 뿐 그 자체가 정의가 될 수 없다. 야당이라고 예의마저 상실해서는 국민 눈살만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는 얼마 전 거창을 방문하여 국가는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라고 말했다. 국민이 잘 사는 것이 목적이지 국가라는 울타리가 국민을 속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소위 생물에 비유하기도 하는 정치는 더욱 그렇다. 스스로 격조를 지키고 예의로써 상대를 대하면 국민도 본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좀 더 덜 대립하고 적을 만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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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보는 데서는 죽을 듯이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돌아서서는 서로 소주잔을 기울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생쇼이다. 정치가 천박해지면 국민은 거칠어진다. 가뜩이나 경제가 안 좋은 터에 불타는 섶에 기름은 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청진동 골목에서 빈대떡을 사이에 두고 "그때 나로 인해 자네가 상했다면 어찌할뻔했나…"고 한 이 말이 가슴에 절절해졌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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