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가 정치 재기 성공
권영길-노회찬 계보 전략 주효
정의당 교섭단체 구성 길 열려

지난해 지방선거 도의원 선거에서 석패했던 여영국 전 도의원이 4·3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화려한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여영국 후보의 당선에 '화려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창원성산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는 고 노회찬 전 의원의 부재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여 후보가 당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눈물을 머금은 분투'이기도 했다.

여영국 당선인에게 고 노회찬 전 의원은 노동운동 동지이자, 정치적 부채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3년 전 성산구 국회의원 선거에 '노회찬'을 모셔온(?) 여 후보에게는 '진보정치의 심장 창원 성산'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과 정의당의 외연을 확장해나가야 한다는 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여 당선인은 일찌감치 '노회찬의 계승자'임을 홍보하며, 자유한국당을 '적폐 정당'으로 규정했다. 당 지도부는 창원성산을 제2당사로 설정하고 상주하다시피 했다.

절치부심한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의 저력에 맞서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민중당 손석형 후보와 단일화 협상은 실패했지만, 민주당 권민호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면서 승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 '권영길-노회찬-여영국'이라는 계보를 내세운 홍보 전략도 주효했다.

▲ 선거운동을 하는 여영국. /경남도민일보 DB

여 당선인은 '노동운동가'다. 1989년 노동자 대투쟁을 추동해나갔던 창원에서 청춘의 전 시기를 던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3년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한 여 당선인은 통일중공업과 S&T중공업 전신이었던 동양기계주식회사에 방위산업체 특례 보충역으로 입사했다.

'통일중공업'과 '여영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당시 통일중공업에서는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이 민주노조 결성을 주도하고 있었고, 여 당선인은 그 대열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후 통일중공업 민주노조 운동은 창원공단을 노동자 대투쟁의 핵심 지역으로 자리매김시킨 불씨가 된다.

1986년 폭력 혐의로 구속됨과 동시에 해고됐다. 5개월 형을 마치고 나온 후, 그는 경남노동자협의회에서 1987년 민주화 투쟁과 1989년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곡점을 지난다.

89년 10월에는 3자 개입 금지법 위반으로 두 번째 구속된다. 1991년 석방된 후 전해투(전국해고자 복직투쟁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민주노총 경남본부장 선거에 출마했다 낙마한 직후였던 2010년 도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도의원으로 활동했던 8년은 정치와 노동현장을 어떻게 이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또한 홍준표 전 지사로부터 '정적'으로 지목되면서 고초 아닌 고초를 겪은 바도 있다.

여 당선인은 선거운동 시기 '노회찬 전 의원이 약속했던 민생 공약을 마무리 짓고 적폐정당 자유한국당을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여 후보의 당선으로 정의당은 다시 국회 교섭단체를 구성할 길이 열렸고, 그가 끊임없이 보여준 실천력도 한층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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