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기자체험단
독립기념관·서대문형무소 등 방문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경남도민일보가 마련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기자체험단'을 함안여중 학생들과 3월 21일과 22일 다녀왔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 위안부 역사관을 둘러보고 신문까지 만들어 보는 활동이다. '미션'과 '도전 골든벨', '소감 발표'로 재미도 더하고 능동성도 키웠다. '여자' '학생'임을 고려하여 3·1운동과 전체 독립운동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와 '학생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 학생들이 독립관에 들러 순국선열 위패 앞에서 헌화·묵념을 하고 있다. /김훤주 기자

◇학생들이 바친바 얼마나 큰지 = 독립기념관에서는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나고 누가 어디서 독립운동을 하고 따위를 머리에 담도록은 되도록 하지 않는 쪽으로 진행했다. 스피커 앞에서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중들 속에서 시뮬레이션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게 했다. 그 시대의 아픔을 멀찍이 떨어져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대신 조금 더 들어가 우리 일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다. 1919년 일본 유학 도중 독립을 선언한 학생들 사진 앞에서 또 10년 뒤 광주학생독립운동 재현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게 한 것도 학생들이 이 나라에 바친 바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도전 골든벨을 했다.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준비했다. 몇 년에 일제강점이 시작되었나? 3·1운동은 몇 년에 일어났나? 해방은 언제 되었나? 유관순 열사는 몇 살에 순국하셨나? 우리 지역 유명 독립운동가는 누구인가? 생각만큼 많이 맞히지는 못했다. 학교 선생님이 학교에서 역사를 아직 배우지 않아서란다. 영어는 유치원서부터 가르치면서 중학생이 역사를 배우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웃픈(웃기면서 슬픈) 현실이다.

▲ 위에서부터 유관순 열사가 출옥 이틀을 앞두고 숨을 거둔 여옥사 8번 방을 살펴보는 학생들. /김훤주 기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도 기억되길 =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마음을 울린 곳은 고문취조장이다. 고문실에 울려퍼지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통과 슬픔을 끌어내었다. 일제가 썼던 고문도구들을 살펴보고 그때의 아픔과는 비교조차 안 되겠지만 고문 체험도 해보았다. 독립운동의 씨앗이 된 조선 말기 항일의병들의 사진을 보면서, 또 5000명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를 보면서 다들 가슴 먹먹해했다.

바깥에는 여러 시설들이 옛 모습 그대로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운동시키려고 만든 부채꼴 모양 격벽장,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가들을 가둔 옥사, 독립과 민주화를 위하여 애쓴 숱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형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눈길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사형장이다. 목에 거는 올가미와 바닥을 내려앉히는 레버 장치를 확인하고는 기겁을 했다. 사형수의 비통함을 대신하듯 그 앞에서 말라죽은 미루나무와 수습한 시신을 처리하는 시구문의 컴컴한 구멍 앞에서 학생들은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서대문형무소 하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주로 떠올린다. 하지만 돌아보면 해방 이후 독재 치하에 희생된 민주화운동가들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유관순 열사가 출소 이틀을 남겨두고 숨을 거둔 여옥사 8번 방도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바로 옆 7번 방에 갇혔던 박진홍·이효정 두 여성독립운동가의 옥중 재회 사연 또한 학생들 마음을 작지 않게 움직였다. 동덕여고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며 10대를 보낸 이들은 1935년 일제에 잡혀와 여기서 다시 만났는데 박진홍은 임신까지 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같은 여자라서 좀더 손쉽게 공감할 수 있었으리라. 한 학생은 박진홍·이효정 두 분도 유관순 열사만큼 많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겼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독립문을 돌아보고 독립관을 찾아 순국선열들께 헌화·묵념했다. 비록 작은 행동이지만 이를 통해 학생 스스로 자기 마음을 정돈하는 효과는 적지 않다. 강당에 모여 오늘 하루 취재한 소감을 발표했다. 다들 지금의 평화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에 놀라며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떤 학생은 여태 역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 나눔의 집 위안부역사관에서 할머니들의 흉상을 살펴보는 학생들과 선생님. /김훤주 기자

◇마음 깊숙이 아픈 역사 담은 시간 = 저녁에는 숙소 회의실에서 신문만들기를 했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끝까지 풀어지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며 낮에 돌아보았던 곳을 떠올리며 기삿거리를 정했다. 기사를 쓰고 신문을 완성하는 과정이 다들 진지했다. 이렇게 완성된 여섯 개의 신문은 한결같이 훌륭했다. 하나만을 두고 잘했다고 뽑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픈 역사를 일부 극소수만 알고 있는 내가 미웠다. 그저 공휴일이라고 여겨지던 여러 역사적인 날들을 그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15년 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조금의 감사함도 느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아는 독립운동가는 서너 분밖에 없었다. 오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보고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후세에 알려지지 않을 수도, 나라가 독립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많은 고통을 받고도 왜 그렇게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을까. 내가 그 시대 사람이었다면 솔직히 말해 나라를 팔아먹었을 수도 있다. 무섭고 총소리가 가득한 세상에 누가 독립을 외치겠냐."

"세상이 기억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몇 없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세태가 변화하여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해도 아직은 유관순 열사뿐이다. 전국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가 기억하는 여성이 몇 없다 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내·며느리·어머니로서 모든 일들을 감내해야 했기에 그 자리를 지키며 온 힘을 다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학생들이 주도한 운동이라 하니 뿌듯하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항상 도전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1929년 광주의 학생들은 다르다. 독립을 위해 먼저 일어선 것도 모자라 참담한 과정을 반복하며 계속 일어섰다. 나는 머리로 기억하지 않고 가슴으로 기억하겠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가했던 모든 학생들을 가슴에 묻으며 속으로 슬퍼하고 속으로 위로하겠다."

이튿날은 나눔의 집 위안부역사관을 돌아보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하나하나 살피는 학생들의 눈길이 남달랐다.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이라면 위안부역사관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어땠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교실에 앉아 머리로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자리에 아픈 역사를 담아가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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