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방문해 '이웃의 정의' 주제로 강연
위안부·원폭피해 등 사과, 평화·동아시아 협력 강조

하토야마 유키오(72) 전 일본 총리가 30일 거창군 웅양면 동호마을에 마련된 강연장에서 '이웃의 정의'란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봄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가운데 동호마을 야외 천막에서 열린 강연은 거창에서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연을 이어오고 있는 연구공간 '파랗게날'이 주최했다. 부인 미유키 씨와 함께 참가한 하토야마 전 총리는 강연 시간 30분 전 도착해 강연에 참가한 100여 명의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념 촬영을 하는 등 한국의 시골마을에서 열리는 이색적인 강연을 즐겼다.

강연에 앞서 파랗게날 대표 연구원 이이화 씨는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로 많은 조선인의 희생이 있었던 동호마을 뒷산 '성기성'을 설명하며, 한·일 양국 질곡의 역사를 넘어 400년 만에 전쟁이 아닌 평화의 친구로 거창을 찾은 하토야마 전 총리를 소개했다. 강연에서 그는 천막에서 열린 강연이 이색적이고, 참가한 주민들이 즐거워 보인다며 국제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하자고 말문을 뗏다.

▲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가 30일 거창군 웅양면 동호마을에서 열린 인문학 강연에 참석했다. 사진은 천막 강연장에서 이야기하는 모습. /김태섭 기자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강연 중 무릎 꿇고 사과 = 하토야마 전 총리는 "과거 일본이 한국에서 오랫동안 인륜에 거스르는 일을 벌인 데 대해 사죄드린다"며 강의 시작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했다.

"몇 년 전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많은 전시물과 자료를 봤는데, 유관순 열사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일본이 많은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앗아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사죄를 드리고 싶다." "종군 위안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이분들에게도 다시 한 번 사죄를 드린다. 이 밖에도 전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죄드린다."

하토야마 전 총리 사죄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2015년 체결한 '한일위안부협정'을 예로 들며 "당시 합의한 내용에 최종적·불가역적이라는 조항이 있는데 한국인들에게 더는 이러한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한국인이 납득하기 쉽지 않은 사항이라고 생각한다"며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치루 선생이 말한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만해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사과해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식민지 지배와 전쟁 등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이 그만해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 사과를 이어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최근 이슈가 되었던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일왕 사죄 발언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천황에 대해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 책임자라고 생각해 발언한 상황으로 이해하지만, 일본에서는 상징적 존재로(일본인에게 폭넓게 존경받는 인물로) 문희상 의장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며 "천황은 일본이 저지른 군국주의 과거사에 수차례 사죄의 발언을 해왔다"고 말했다. 또 "사죄 발언을 한 천황의 마음이 전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천황의 사죄와 아베의 생각은 괴리가 있다"며 최근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를 우려했다.

전범기업 판결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전범기업과 관련해 자주 나오는 말이 1965년 청구권 조항인데, 1991년 야나이 조약국장이 '국가 간 청구권은 없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존재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답변은 청구권 문제의 마지막 발언이다. 징용공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앞으로 그분들의 인간적인 존엄을 위해 양국 간 긴밀히 협력해 합리적 결론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역사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는 계기가 있다고 밝혔다. "26년 전 처음 한국에 와 전시 이산가족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다. 강제 동원된 사할린 한인들의 이산가족 문제였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일시 귀국이라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많이 들었다. 당시 회의를 하며 일본이 이분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전쟁이 많은 이들에게 비극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정치인들의 역할은 이러한 비극을 해소하는 것으로,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금까지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하토야마 총리는 원폭피해자들에게도 사죄의 말을 전했다. "얼마 전 합천군을 방문해 일본과 한국의 원폭피해자가 다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을 차별해 왔던 과거를 사죄한다"고 밝혔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강연 내내 무릎 꿇은 자세로 사죄의 말을 전했다.

▲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가 30일 거창에서 열린 강연 중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 /김태섭 기자

◇"우애를 기초로 한 동아시아공동체 실현하자" = 하토야마 전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사죄 발언에 이어 '우애'를 기초로 한 '동아시아공동체'를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한국·중국·일본은 가까이 사는 이웃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왜 친하게 지내지 못할까?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50년대 일본 총리를 지내셨던 하토야마 이치로 할아버지가 말해준 우애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우애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자립'이며 하나는 '공생'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상호존중과 상호이해, 상호부조 관계에서 서로 차이를 인정하며, 협력할 때 자립과 공생의 우애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우애사상을 정치에 도입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동안 일본 국회에서 우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나카소네 전 총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여름이면 녹아내릴 생각'이라고 비판을 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을 받고도 우애는 전체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평화의 무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또 "현재 일본 사회는 전체주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개인이 국가를 위해 톱니바퀴처럼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수단일 뿐 목적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간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우애정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우애가 존재한다"며 국가가 자립하고 공생하는 모습을 통해 우애에 기초한 동아시아공동체 건설을 역설했다. "국가가 서로 관계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 간 공립과 공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중국·일본이 우애로 연결된 상태를 꿈꾼다"며 "구체적인 정책으로 동아시아공동체를 제시한 바 있다"고 밝혔다. 특히 아베와 트럼프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며 "국제화, 글로벌화라는 이름 아래 사람·재화·정보의 유통이 자유롭지만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국 중심주의는 잘못된 국가 관계를 고착시키고 있다. 엄청난 마찰을 빚는 무역만 봐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강연을 하며 위안부, 전범기업, 원폭피해자 문제 등에 사과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김태섭 기자

그는 세계화와 자국 중심주의의 절충안으로 공동체주의를 제안했다. "한국·중국·일본이 서로를 위해 협력하는 체계를 만들면 윈윈할 수 있다. 이것이 우애에 기초한 동아시아공동체다"라는 주장이다. 한·중·일 모두 강점과 약점이 있는데, 강점을 살려 다른 나라를 돕고 보완하면 국가 간 동반 성장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과 일본이 우애를 가지고 동아시아공동체 중심을 어떻게 세울지 고민해 나가자"며 "여러 해답 중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의 답을 찾았다. 나는 일본에서 여기에 왔고, 나를 보러 많은 사람이 여기 온 것 자체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며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답"이라며 강연을 마쳤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강연을 마친 후 거창향교를 방문해 김삼수 전교와 환담을 나누고, 향교의 유래와 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위천면 황산마을 고가촌으로 옮겨 전통 한식 식사를 끝으로 거창 방문 일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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