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출신 섬 소년
대한민국 정치현실과 만나다

거제 출신으로 대구일보 정치부 서울파견 기자로 일하고 있는 이상훈(38) 씨는

영남지역 일당독점 구조의 폐해를 지적하는 기사를 많이 써왔다.

이 기자는 "대구·경북의 보수정당 지지와 호남의 진보정당 지지가

지역 현안이나 이슈에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것에는 수월하지만 실제 지역발전에 크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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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7월 둘째 지안이(오른쪽에서 둘째) 돌 때 가족과 함께. /이상훈 씨

계룡산 아래 골목대장이던 어린 시절

Q. 거제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출생지 등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81년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에서 외동으로 태어났습니다. 현재는 고현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룡초등학교 입학 전 부산과 마산에서도 잠시 살았는데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거제에 살았습니다. 그러다 고현중학교 입학 후 얼마 안 돼 대구로 이사를 갔고 대구에서 중·고교, 대학교를 모두 나왔죠."

Q. 조상 대대로 거제에서 살아왔던 건가요? 부모님 등 거제에 살고 있는 가족이 아직 있나요?

"할아버지와 친가 친척은 대대로 고성에서 사셨습니다. 6·25 전쟁 후 부산 영도에 정착해 아버지는 부산에서 태어나셨죠. 아버지가 거제 조선소에서 일을 하면서 정착하게 됐습니다. 현재 어머니는 대구에 계시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통영에서 지내시다 주말에 대구로 오곤 하세요." 

Q. 어릴 때지만 꽤 오래 있었으니 거제에 관한 기억이 많을 것 같습니다.

"조선소가 있는 거제는 도시와 농어촌 문화가 반반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시골이었단 생각을 해요. 요즘으로 치면 '인싸(인사이더)', 그때는 골목대장이었는데 살던 집 뒷산이 계룡산이었습니다. 친구, 동생들 데리고 산속에 있는 저수지 가서 수영도 하고 골짜기에서 가재도 잡고 토끼굴에 불 피워 놓고 쫓아다니곤 했습니다. 물론 토끼는 못 잡았지만. 불 하니까 생각나는 게 쥐불놀이인데 남은 숯을 모아서 고구마 구워 먹다 넘어졌는데 손을 불섶에 짚는 바람에 화상을 입기도 했네요. 또 '섬 소년'이다 보니 학동, 여차, 구조라, 명사 등 거제의 유명한 해수욕장은 다 다녔고 자연산 생선회, 해산물을 엄청나게 먹었습니다. 요즘 흔한 양식이 아니라 해녀가 따온 전복을 현장에서 바로 먹었던 거라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장에서 팔던 순대도 그립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순대를 찍어 먹던 막장이 먹고 싶어요. 대구나 서울은 소금을 찍어 먹던데 순대는 막장이 진리죠."

Q. 대구로 가게 된 건 어떤 사연인가요. 또 서울·수도권에 자리 잡은 건 언제인지도 궁금합니다.

"저의 학업 환경을 걱정하시던 부모님께서 대구 수성구로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대구에 마침 외삼촌, 이모 등 외가 친척들이 살고 있었구요. 거제는 당시 고교 진학이 비평준화로 시험을 쳐서 성적이 미달되면 타 지역으로 가 기숙사나 자취·하숙을 해야 했어요. 일찍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딱 좋은' 상황이 펼쳐지는 거죠. 아버지는 조선소에서 얼마간 일을 더 하시다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 등을 모아서 대구에 식당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장사가 잘 안됐고 IMF 사태까지 오면서 가정경제가 위기를 맞기도 했죠. 그 와중에도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 대한 학구열은 높으셔서 절 대학원(경영정보학과)까지 보냈습니다. 그 후 전 2011년 대구일보 기자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뎠고 2012년 서울지사로 파견 발령이 나 계속 여기에 있는 거죠."

정치부 기자로서 국회·청와대 출입

Q. 왜 여러 직업 중 기자를 택했나요. 원래부터 꿈이 기자였나요.

"대학원 생활 중 알게 된 지인이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남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저를 보고 '기자 해보는 게 어떠냐'고 추천해주었습니다. 고교 시절에는 체육 선생님이 되고 싶어 사범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운동하는 걸 좋아했죠. 하지만 학부 생활은 녹록지 않았어요. 체대 선배들의 후배에 대한 군기는 엄했고 얼차려, 흔히 말하는 따까리, 집합 등이 종종 이어졌습니다. 자유와 낭만이 가득한 캠퍼스에 대한 환상과는 정반대로 흘렀죠. 그러던 중 평소 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노래를 곧잘 했던 저는 교내 밴드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군대 입대 전까지는 하드락과 메탈에 심취해 푹 빠져 살았죠. 딥퍼플, 레드제플린, 미스터빅, 건즈앤로지스 등 해외 밴드뿐 아니라 무한궤도, 시나위, 윤도현밴드, 임재범, 박완규, 김경호, 크라잉넛 같은 국내 밴드까지 다양하게 연주했습니다. 락밴드 보컬로 평생 음악을 하는 게 꿈이었어요."

Q. 기자로서는 주로 어떤 영역을 담당했나요. 또 궁금한 게 보통 정치부 서울파견 기자는 연차가 좀 있는 분들이 하는 게 보통인데 사연이 있나요?

"사회부 기자로 잠깐 있었고 그 후 쭉 정치부에서만 있었습니다. 2012년 서울 파견 발령이 나면서 국회 출입 기자로 5년 정도 활동하다 재작년부터는 청와대도 같이 맡고 있습니다. 대구·경북 지역 국회의원과 정치인 중심으로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보통 연차가 있고 나이가 있는 기혼자가 서울에 파견을 갔는데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회사에서 미혼 중 남자 기자를 찾았고 서울에 먼저 와 있던 선배가 저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또 2년 정도 주기로 출입처를 바꾸면 인적 네트워크가 쌓여 일 좀 할 만할 때 대구 본사로 가야 되고 하니 제가 서울에 오래 있을 거라 판단하고 발령을 낸 듯해요. 마침 전 서울에 와서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구요."

Q. 기자 생활을 하며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이나 기억에 남는 기사를 꼽는다면.

"정치부에 오래 있다 보니 영·호남 지역감정이 정치적 갈등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아주 많이 접했습니다. 특히 대구·경북의 보수정당 지지와 호남의 진보정당 지지가 지역 현안이나 이슈에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것에는 수월하지만 지역발전에 크게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대구·경북 정치인도 일당독점 구조, 즉 보수정당 독과점을 깨야 한다는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결국 20대 총선에서 대구에 진보정당 당선자가 탄생했는데, 다양한 정당이 선택받을 수 있는 정치 지형이 펼쳐진 게 뿌듯했습니다. 지난 1988년 소선구제가 도입된 이후 민주당 계열 후보가 대구에서 당선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쉬움도 있습니다. 경북 국회의원은 여전히 일당독점입니다. 내년 총선에서는 능력 있고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인이 당선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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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훈 대구일보 기자. /고동우 기자

"감시와 비판이라는 언론 역할 지킬 것"

Q. 기자로서 직업 철학, 원칙,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게 혹 있습니까.

"초심을 잃지 않는 것,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반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수습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들었던 기자윤리, 언론윤리를 되새기며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조직이나 집단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언론의 역할이 바로 다른 조직이나 집단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국민들은 부정적입니다. '기레기'란 말을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니까요. 취재 현장에서 언론윤리를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기자도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고 지금 거주하는 곳은 어디인지?

"아내와 5살 된 아들, 3살인 딸이 있습니다. 사는 곳은 김포 한강신도시입니다."

Q. 고향인 거제를 포함해 경남 쪽에 종종 갈 일이 있는지?

"아내와 연애 시절에 거제-부산을 잇는 거가대교가 생겨 한번 가봤습니다. 엄청나게 변했고 많이 발전했다고 느꼈습니다. 다니던 초등학교도 가봤는데 당시엔 크게만 보이던 운동장이 너무 작아 보였어요. 아버지 낚싯대를 들고 항상 가던 고현 앞바다 매립지도 갔는데 그때 잡았던 게르치, 놀래미 생각도 나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라구요. 아이들이 생기기 전에는 아버지 뵈러 통영에 가끔 가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부산에 종종 갑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기제사와 명절 때 또 친지들 경조사 참석하러요."

Q. 일 외에 특별한 취미나 공부하는 분야 등이 있습니까.

"아이스하키 클럽 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종목 운동을 해왔는데 지금은 국회출입기자단 축구팀에서 리그전에 참가하고 개인 운동(웨이트 트레이닝) 하는 정도입니다. 아내 혼자 아이 둘을 돌보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아이들과 놀아주고 함께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애들과 뛰고 달리고 구르고 하는 게 보통 체력으론 안 되더라고요. 아빠가 에너지가 넘쳐야 가정에 활력이 생기고 집안 분위기도 좋아집니다. 가장이 되고 깨달은 겁니다. 가끔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도 찾아서 듣곤 합니다."

Q. 앞으로 삶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오늘, 지금 당장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제 존재 이유이자 전부죠.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서, 남자로서 가정을 지키고 항상 웃게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다만 취재원들 만나는 게 일이다 보니 귀가가 늦을 때가 많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평생 갚는다는 자세로 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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