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터뷰가 공개 구혼장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함안에서 달걀을 도매하는 박재효 씨는 지난 1월 '적십자헌혈유공장 최고명예대장'을 받았다.

헌혈을 300회 이상 해야 받을 수 있는 영예다.

그가 사는 함안에는 '헌혈의 집'이 없다.

박재효 씨는 굳이 인근 창원까지 차를 몰고 가 2주에 한 번씩 헌혈한다.

자칭·타칭 노총각 '알부자'에게 짠하고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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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효 씨. /손유진 기자

연이은 사업 실패, 달걀 도매상으로 재기

Q.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함안 시장 내에서 달걀 도매상을 하고 있고 우리 나이로 올해 43에 아직 싱글인 박재효라고 합니다."

Q. 헌혈을 300회 했다고 들었습니다다. 헌혈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창원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부산에서 다녔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요. 주말에 한번 함안에 있는 집에 오려면 부산 사상에 있는 터미널에서 차를 타야 했어요.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좀 남아서 헌혈을 했는데 그때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네요."

Q. 대학원 공부까지 했는데 달걀 도매상을 하면 배운 게 아깝지 않습니까?

"미생물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어머님께서 김치공장을 하셨는데 제가 경영에 도움되길 바라셨어요. 그래서 부산에서 대학원에 다녔어요. 그리고 어머니를 도와 김치 공장을 같이 운영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름 잘 되었어요. 여러 곳에서 김치 납품해달라고 찾아와서 계약하고 납품했죠. 그런데 저희랑 고춧가루 거래하는 포항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박 사장. 너거 김치 포항에도 들어오나? 뭐가 이상하다. 함 잘 알아봐라." 사기였어요. 물건만 받고 튄 거죠. 그렇게 당하고도 두 번을 더 당했어요. 결국, 20억 원 정도 손해 보고 공장은 경매로 넘어갔어요. 깔끔하게 말아 먹었죠."

Q. 김치 공장을 접은 후에 또 다른 일을 했나요?

"창원 명곡로터리에서 '라이브 호프'를 4년 정도 했어요. 지역 가수나 연주자를 섭외해서 연주도 하고 직접 만든 수제 생맥주도 팔았어요. 어떤 날엔 하루에 카드사에서 몇백만 원이 입금될 정도로 장사는 꽤 잘됐었어요. 공연하는 가수나 연주자 중에 유명해진 사람도 있었고요. 그런데 건물주가 갑자기 가게를 판다고 비워달라더군요. 결국, 권리금 회수도 못 하고 1억 원 정도 손해 봤습니다."

Q. 그 이후로 달걀 도매상을 시작하게 된 건가요?

"네. 한 1년 가까이 쉬면서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어머니 친척 되시는 분이 달걀 도매상을 하고 계셨는데 처분하려고 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당장 저보고 대신 맡아서 하라고 하시더군요. 도매상을 시작한 지 올해로 7년 정도 됐는데 마트랑 회사 식당 등 거래처를 새로 만들며 2년 동안 열심히 해서 호프집 때 생긴 빚 1억 원을 다 갚았어요. 그땐 정말 일만 열심히 했어요."

Q. 달걀 도매상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면 좀 힘들고요. 재작년에 살충제 달걀 파동 때는 장난이 아니었어요. 일일이 다니면서 확인하고 수거하고 폐기하고…. 휴~ 그때가 이 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양계업 하시는 분들이 더 고통이 컸겠지만요. 당시 딱히 살충제에 대한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많이 억울해 하시더라고요."

Q. 곧 부활절을 앞두고 있어 달걀을 많이 찾을 시기 같습니다.

"확실히 부활절이 다가오면 인근 교회나 성당에서 달걀을 많이 찾습니다. 이 시기에 달걀값이 오르거든요. 그런데 꾸준히 하는 사업이다 보니 달걀 시세가 올랐다고 해서 가격을 올려 받질 못해요. 매출은 느는데 수익은 별 차이 없는 거죠. 몸만 더 힘들어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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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효 씨./손유진 기자

"좋은 인연 만나 연애하고파"

Q. 앞서 아직 싱글이라고 밝혔습니다. 비혼주의자인가요?

"비혼주의자는 아닙니다. 하하하. 저 장가 무척 가고 싶어요. 아무래도 사업을 하다가 몇 번 실패하다 보니 그것 해결한다고 좀 많이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귀었던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연애를 할 시간이 좀 없었네요. 이제 경제적으로 여유가 조금 생겼습니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연애 상대를 만날 기회가 잘 안 생기네요. 가끔 소개가 들어오는데요. 보시다시피 가게가 이렇게 조그마하고 달걀 판다고 하니까 트럭에 달걀 싣고 골목골목 누비면서 "계란이 왔어요~" 같은 방송 하며 달걀을 파는 줄 알고 아예 소개 장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참 씁쓸하죠."

Q. 아직도 낡은 휴대 전화를 쓰는 것 같은데. 혹시 너무 '올드'해서 아직 솔로가 아닌가요?

"011 번호를 아직 쓰고 있습니다. 좀 '올드'하게 보이나요? 하긴 저희 어머니도 제가 이 전화를 쓰고 있으니 여자 친구가 안 생긴다며 당장 스마트폰으로 바꾸라고 하셨어요. 결국,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작년 말부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습니다. 옛 전화는 사업용, 스마트폰은 SNS용으로 둘 다 열심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Q. 혹시 연애를 못하는 스트레스를 헌혈로 푸는 건 아닙니까?

"글쎄요. 그런 건 아니고요. 이게 습관이라고 해야 할까요? 왠지 헌혈을 안 하면 미안하고 죄짓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제가 일반인 보다 혈소판 수치가 좀 높아서 혈소판만 헌혈하는 성분헌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2주에 한번 씩 헌혈을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헌혈을 300회 이상 하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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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효 씨가 모아 둔 헌혈증. /손유진 기자

"경남 최다 헌혈 기록, 갱신하고 싶어"

Q. 정말 대단합니다. 300회 헌혈을 하면서 힘든 일은 없었나요?

"가장 힘든 점은 지금 제가 사는 지역에는 헌혈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헌혈의 집'이라고 하죠. 군 단위 지역에는 헌혈의 집이 없습니다. 창원시에는 정우상가 쪽에 있고 경남대 쪽에 있는데요. 저는 헌혈을 하러 2주마다 함안에서 경남대 헌혈의 집으로 직접 차를 몰고 갑니다. 이 정도면 같은 300회라도 수준이 다른 게 아닐까요?. 하하하. 그리고 작년에는 어깨 수술이 있어 1년 정도 헌혈을 못 했어요. 아무래도 투약을 하니까 그 시기에는 헌혈이 되지 않죠."

Q. 헌혈을 하면서 보람 느낀 적이 있나요?

"창원 헌혈의 집에 갔을 때였을 겁니다. 백혈병을 앓던 40대 가장이 오셨는데 헌혈증을 기부한 사람들 덕분에 완치가 되었다며 복직을 앞두고 아들과 함께 전국 헌혈의 집을 모두 돌며 감사인사를 드리는 중이라더군요. 마침 제가 헌혈 다회자라는 이유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던데 완치가 되어 전국으로 여행할 정도로 건강해진 모습을 보니 뿌듯하더군요. 그리고 300회 이상을 하면 최고명예대장에 오르는 데요. 이게 헌혈의 '끝판 왕'이죠. 더 많이 해도 그 이상은 없어요. 이거 받을 때도 보람이 있었죠. 경남에서도 몇 분 없거든요."

Q. 앞으로 언제까지 헌혈을 계속 할 생각이신가요?

"경남 지역에서 제일 많이 하신 분이 '아름다운 가게' 사파점의 점장님으로 계시는 최명 씨라 들었는데요. 솔직히 이분 기록을 깨고 싶다는 욕심도 살짝 들긴 합니다. 그런데 헌혈할 수 있는 나이 제한이 있어서요. 저 같은 혈소판 헌혈 같은 경우는 만 59세 까지라고 하는데 그때까지 노력해 봐야죠. 그러려면 관리도 잘해야 해요. 헌혈하기 전날에는 술, 고기도 안된다니까요."

Q. 앞으로 바라는 일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업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고 있어 이쪽은 크게 욕심이 없는데, 결혼 욕심이 있죠. 뭐 주변에서는 "결혼 왜 하냐? 그냥 혼자 살아라"라고 이야기들 하지만 저한테는 배부른 투정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하하하. 한 번뿐인 인생 남들 다 가보는 장가도 가야죠. 옛말에 중매를 잘 서면 '술이 석 잔'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주변에 제가 공약을 걸었어요. 겨우 술 석 잔요? 에이~ 석 잔씩 수 백번을 마실 만한 걸 내 걸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 인터뷰가 공개 구혼이 돼도 좋겠네요. 그런데 이 잡지 구독자 중에 여성분들이 많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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