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월 15일, 창원에 있는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말모이>를 보았다. 말모이는 우리말을 모은다는 뜻으로 사전의 이름이자 말을 모으는 운동이었다. 영화는 일자무식꾼 김판수(배우 유해진)과 엘리트 지식인 류정환(배우 윤계상)의 뛰어난 연기로 재미와 감동이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주인공인 류정환의 실제 모델은 조선어학회를 진두지휘한 이극로이다.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다가 교사로부터 호되게 뺨을 얻어맞는 첫 장면부터 살벌한 식민지 억압에 분노하였다. "말이 모인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인 곳에 뜻이 모이고, 뜻이 모인 곳에 비로소 독립이 있다'는 대사를 들으면서 우리말을 지키느라고 고생하는 조선어학회 일꾼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 당시에는 사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항 이후인 1874년의 로한사전과 1880년 프랑스 파리에서 선교사들이 천주교 홍보를 위해 한글을 배워 그 부산물로 한불사전을 출판하였고 이어서 1890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일본에서 출판한 한영자전, 1897년 영국인 선교사 데일리가 한영자전을, 그리고 1911년부터 8년에 걸쳐 약 5만 8천여 어휘를 모아 1920년에 조선총독부가 일본어로 대역한 조선어사전 등을 편찬하긴 했으나 이는 모두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우기 위해 만든 것으로 대역사전(對譯辭典)의 역할을 할 뿐이어서 여전히 한글에 대한 표준적인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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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모이>에 나오는 조선어학회 사무실 낱말카드를 모아 놓은 지하창고. /전점석

주시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글 단체 국문연구회 창립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고종 때에 정부 안에 우리 글자를 다듬고 널리 쓰게 하려고 국문연구소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국립 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1896년 주시경이 만든 국문동식회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김정진 등을 중심으로 우리말과 글의 연구, 통일, 발전을 목표로 조직된 최초의 한글 단체인 국문연구회(국어연구학회)는 상동청년학원 안에 강습소를 개설하였으며 경술국치 직후인 3년 후, 1911년 9월 3일 배달말, 글모음,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회장은 주시경이었다. 이때부터 조선어사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1912년 후진 양성을 위해 국어강습소 대신에 초등, 중등, 고등과의 조선어강습원을 개설하여 이규영, 이병기, 권덕규, 신명균, 최현배, 정열모, 김두봉, 현상윤 등의 제자들이 졸업하여 이후 한글 운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다시 1913년 3월 22일 한글모로 개칭하였다. 회장은 주시경이 선출되었다. 스승을 닮고 싶었던 제자들은 주시경을 따라 여름방학 한글강습회 강사로 전국 지방을 돌아다녔다. 그 후 이 단체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 1931년 조선어학회 등으로 바뀌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민족계몽운동 단체의 하나로 최남선이 설립한 조선광문회는 설립취지가 '修史, 理言, 立學' 등 3가지였다. 이 중에서 이언(理言)이 언어정리 문제였다. 최남선은 광문회를 오늘날의 북클럽, 독서클럽과 비슷하게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의 사랑방으로 운영하였다. 조선광문회에서는 1911년부터 주시경과 그의 제자인 김두봉, 권덕규(權悳圭·휘문학교 교사), 이규영(李奎榮) 등이 모여 1915년에 <신자전(新子典)>을 편찬하였고 이어서 말모이(사전)인 <조선어자전(朝鮮語字典)>을 시작했으며 말모이 편찬사업은 김두봉이 주도하였다. 이것이 사전편찬사업의 효시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서너 해 계속 되다가 중단되었다. 1914년 7월,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주시경은 1914년, 급체로 일본인 의사가 개업한 병원에 치료차 들렸다가 죽었다.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 죽음에는 의문점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시경이 주도한 한글 운동의 주 무대는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였고 전덕기 목사는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회장으로 을시늑약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을사오적 처단을 모의한 인물이었다. 주시경이 죽고 나서 사전편찬작업이 중단되었다가 김두봉에 의해 1916년에 말본책이 집필되었다. 그 후 김두봉은 1919년 3·1운동 때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가담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기 위해 한 달간 이집 저집으로 피해 다니다가 4월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어서 1920년 이규영의 죽음으로 사전편찬작업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 조선어학연구회의 두 흐름

이후부터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주시경이 죽은 지 7년 후인 1921년에 창립된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에 창립된 조선어학연구회가 각각 사전편찬작업을 하였다. 먼저 주시경의 강습원 출신 제자인 신명균, 장지영(조선일보 문화부장), 이병기, 김윤경, 권덕규, 임경재(휘문학교 교장), 최두선, 이승규, 이상춘 등 11명에 의해 1921년 12월 3일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발기회를 갖고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다. 간사장은 임경재, 간사는 장지영, 최두선이었다. 주로 교사들이 중심이었고 회원수도 많지 않아 8~10명이 모여 발표회를 갖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창립 6년이 지난 1929년 재조직하여 사전편찬을 민족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이극로, 이윤재 등의 참여와 편찬회의 창립을 계기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주시경이 죽은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실질적으로 편찬회 내에서 이루어진 편찬작업은 모두 연구회 회원들이 진행하였다.

한편 민족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한글학자 박승빈이 주도하여 1921년 결성된 계명구락부는 최남선, 문일평, 윤치호, 오세창, 박승빈, 이능화 등 상류층의 변호사, 사업가, 의사, 은행원이 주동하였으며 1927년 6월 최남선의 주선으로 그동안 조선광문회가 주시경, 김두봉을 중심으로 3~4년 동안 진행한 사전 원고를 계명구락부가 넘겨받아 간사였던 심우섭 등이 사전편찬에 착수하였다가 1928년 구락부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사전편찬을 결의하고 사전편찬위원회 총재에 최남선, 감독에 정인보, 서무에 한징, 편집에 최남선, 정인보, 임규, 이윤재, 양건식, 변영로 등을 선출하고 편찬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런 점에서 광문회는 우리말 사전편찬의 초석을 쌓았다. 광문회는 사전편찬 이외에도 고문헌의 보존과 간행사업으로 동국통감, 열하일기를 펴내고 서유기, 춘향전, 장화홍련전 등의 육전(六錢)소설을 한글로 개작해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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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우리말강습회를 개최한다는 광고(조선일보 1926년 12월 16일자). /전점석

노산은 1928년부터 계명구락부에서 환산과 함께 사전편찬 일을 시작

환산 이윤재는 1927년 6월부터 계명구락부가 설립한 조선어사전편찬소에서 사전 집필에 참여하고 있었다. 1928년 6월에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노산은 환산의 부름을 받고 계명구락부에 참여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일을 하였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구 황족 이강 등 몇 사람의 일시 원조금으로 시작하였으나 1929년에 경비 부족에 직면했다. 1년간 운영하면서 연이은 편찬원의 사퇴와 철자법의 불통일 때문에 지지부진하여 환산은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편찬소를 탈퇴하였다. 결국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 작업은 10만 카드까지 작성하였지만 1934년 중단되었다. 1931년 11월에 계명구락부 주최로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를 주관한 박승빈과 그를 지지하는 20여 명이 모여 친일세력인 윤치호의 도움을 받아 조선어학연구회를 12월 10일에 창립하고 간사장 이긍종, 간사에 백남규, 신남철, 문시혁, 정규창 등을 선출하였다. 신남철은 1932년에 '조선어 철자법문제의 위기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조선어학연구회는 우리 글자 이름도 한글이 아닌 정음이라고 하면서 기관지 <정음(正音)>을 발간하였고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맞춤법을 반대하였고 한동안 주시경학파가 중심인 조선어학회와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어학회는 형태론적 입장에서 표기법의 원리를 삼아 종래의 전통적 표기법을 전적으로 변혁하려는 것이었고 조선어학연구회는 음운론적 입장에 서서 표기법을 제정하여 종래의 전통적 표기법을 가능한 한 살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명구락부를 모태로 출발한 조선어학연구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반대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두 단체는 비슷한 한글 단체 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어학회는 탄압을 받았고 박승빈은 황국신민이 되자고 친일활동을 하였다. 계명구락부가 1932년 7월에 발간한 <계명(啓明)> 제22호에는 한글과 에스페란토로 나란히 적힌 계명구락부 연혁이 실려 있다. 1933년에는 어학강좌라는 이름으로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열기도 했다. 강의는 이광수, 백남규가 담당하였다. 대종교인인 백남규는 주시경으로부터 한글강습을 받았고 에스페란토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계명구락부를 탈퇴한 환산은 사전원고를 얻기 위해서 중국 상하이를 방문하여 독자적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김두봉을 만나 편찬회의 참여를 권유하고 2주간 머물다가 돌아왔다. 왜냐하면 김두봉은 광문회와 사전편찬회를 잇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며 사전 편찬사업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나중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불온단체로 조작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환산은 북경 유학시절에는 단재 신채호를 만난 적도 있다.

조선어사전편찬회 결성취지문을 노산이 작성

환산은 1929년 10월 31일 한글날(한글창제 483년)에 서울 수표동의 조선교육협회 회관에서 이극로가 간사장이 되어 이승훈, 홍명희, 최현배 등 각계인사 108명과 함께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사전편찬회 회장은 이우식, 간사(상무위원)에 이극로, 이윤재, 이중건, 신명균, 최현배 등 5명 그리고 32명의 준비위원을 선출하였다. 임원의 대부분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었다. 발기인 108명은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이 농후한 사람들이고 그 중의 반수 이상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극로, 정열모, 김두봉 등 여러 명은 대종교 관계자였으며 10여 명은 동아일보 전 현직 인사들이었다. 사전편찬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이극로는 대종교 교인이었는데 1942년 대종교의 경의원 참의로 활동하면서 창가집인 <한얼노래집>을 완성했다. 그는 시재를 발휘해서 전체 한얼노래 37곡 중에 28곡의 작사를 했다. 사전편찬회의 결성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대 사건이었으며 본격적인 사전편찬의 시작이었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2일 자 1면에는 창립에 관한 사설을 싣고, 2면에 창립 사진과 108명의 명단을 게재할 만큼 언론의 주목과 환영을 받았다. 이 창립은 이극로가 1929년 봄,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환산 이윤재(1888~1943년)는 조직 작업부터 이극로와 함께하였고 편찬회 상무위원과 조선어연구회 상임감사에 선임되었다. 편찬회의 결성취지문은 노산 이은상이 작성하였다. 노산은 먼저 우리 어음, 어법의 표준이 없고 통일이 되지 않아 문화향상과 보급에 막대한 손실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동안의 외국인에 의한 사전발간과 조선광문회의 노력을 언급한 뒤에 이를 계승하여 민족적 백년대계로 사전을 편찬하니 강호의 동지들에게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노산은 32명의 창립준비위원과 5명의 집행위원, 5명의 상무위원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준비위원 명단에는 한글학자뿐만 아니라 명도석, 방정환, 백낙준, 이광수, 이만규, 조만식, 주요한, 최두선(중앙학교 교장) 등의 문필가와 지역인사들도 참여하였다.

이 당시 두 단체는 역할분담을 하였는데 편찬회는 사전편찬의 일반업무인 어휘수집 및 주해, 편집을 맡았고 조선어연구회는 사전편찬의 기초작업인 맞춤법통일안, 표준어의 조사, 결정 등을 맡았다. 편찬회는 이극로, 이윤재, 한징, 이용기, 김선기 등 5인을 편찬원으로 선정하고 각종 어휘를 수집하였다. 환산은 1931년 1월에 편찬회 간사로 선임되고 이후 1931년까지 사전편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노산 이은상 선생>을 쓴 김봉천은 노산 역시 환산과 함께 조선어학회 회원으로서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하면서 각종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편찬회, 연구회, 어학회를 혼동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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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가나다순으로 모은 원고. /전점석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할 때 노산은 동아일보에 근무 중

한편 이극로가 중심인 조선어연구회는 1930년 12월 13일의 총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이극로, 이윤재, 이희승(1896~1989년), 이병기, 최현배(1894~1970년), 김원경 등 12인의 제정위원을 선정하였는데 노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개명하였고 상무위원으로 이극로가 활동하였다. 25명의 창립회원은 이극로,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정인섭, 최현배, 김윤경, 권덕규 등인데 이은상은 참여하지 않았다. 노산이 월간잡지 <신생>의 편집장으로 있을 때였다. 이즈음 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을 새롭게 출발하였는데 편집인은 이윤재였다. 이때 외래어 표기법 제정위원회도 별도로 구성하였다. 만해 한용운은 삼천리 1931년 9월호(통권 3권 9호)에 한글맞춤법 통일안 보급방법으로 교과서 편찬, 언론기관과 문필가의 참여, 대중을 위한 한글강습회 등을 제시하였다.다음 해인 1932년 12월 22일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는 기존의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12인에 6인을 더 증원하였는데 18인의 제정위원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제정위원들은 수차례에 걸친 독회를 거쳐서 10인의 수정위원회를 거쳐서 다시 9인의 정리위원회를 거쳐서 비로소 1933년 10월 19일 임시총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 최종안을 가결하였다. 3년에 걸쳐서 총 433시간, 125차의 회의를 하였다. 열흘 후인 10월 29일 제487돌 한글날에 역사적인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반포되었다. 이 통일안을 가장 먼저 사용한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이미 공포 6개월 전부터 거의 완성된 통일안을 적용해 1933년 4월 1일 자부터 새 활자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특별부록으로 제작하여 독자들에게 배포하였으며 조선일보는 이극로와의 대담기사를, 동아일보는 지지 사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 당시 이은상은 동아일보에 재직 중이었다. 이후부터 다른 신문, 잡지도 뒤따라 새 맞춤법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승빈을 중심으로 한 정음파는 이를 계기로 더욱 격렬한 반대 운동을 하였다. 반대이유는 통일안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1934년 7월 9일 문필가 78명이 '조선 문예가 일동' 명의로 발표한 '한글 철자법 시비에 대한 성명서'로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 성명서는 김동인, 양주동, 이태준, 채만식, 정지용, 이광수, 이은상 등이 조선어학회의 맞춤법통일안을 찬성하는 지지 성명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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