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생인 아버지(87세)는 오토바이(스쿠터)가 있지만 이제 타지 않는다. 아버지의 스쿠터는 작년부터 창고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

오토바이는 내내 타지 않고 세워만 두면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한 달에 한 번쯤 배터리 충전을 위해서 시동을 걸고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다 어느 정도 충전이 되었다 싶으면 원래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세워 놓는다.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지금까지 세워두기만 한 건 작년 가을부터였다. 그리고 그 한참 전부터 타는 횟수가 부쩍 줄었었다. 예전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야읍내를 드나드셨다. 친구들을 만나고, 축협이나 농협에 가서 신문을 보고, 가끔은 어머니가 사 오라고 하는 물건들을 사날랐다. 또 드물게는 머리하러 미용실에 가고자 하는 어머니를 태우고 가야읍내까지 택시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오토바이가 아버지의 완벽한 발이었다. 가야읍내 갈 때도, 들에 갈 때도, 혹은 함안 군내 여기저기서 열리는 행사장에 놀러가실 때도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가셨다. 오토바이나 차가 없는 이웃집 아재들을 태우고 바람을 쒜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토바이를 보고도 타려고 하지 않으신다. "이제 영 어지러워서 못타시는갑다"라고만 생각한다. 그래도 어느 날 문득 오토바이 타고 가야읍내 가야겠다고 나설 것 같아서 관리는 계속한다. 관리라고 해봐야 간혹 가서 기름 떨어졌는지(사실 안 타니까 기름 떨어질 리는 없다) 살펴보고, 충전을 위해 한 바퀴 타고 세워두는 것뿐이다. 얼마 전에는 양쪽 손잡이 끝에 달려 있어야 할 밸런서가 없어서 인터넷으로 황금색 밸런서를 주문해서 달아놓았다. 부질없는 짓을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자가용, 오토바이에 그것을 달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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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아버지의 발이었던 중국 하우즈스즈키 조이스타100. 지금은 거의 1년이 가까이 창고 옆 자리만 지키고 있다. 아버지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을 한 장 남겨야겠다 싶어서 스쿠터를 마당으로 끌어내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같이 찍었다. 두 분이 저렇게 같이 스쿠터를 타고 가야읍내 나들이를 하는 날이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조재영 기자

하우즈스즈키 조이스타100

지금 창고 옆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오토바이는 중국 하우즈가 일본 스즈키의 기술로 만든 100cc 스쿠터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14년 무렵인 듯싶다. 나는 당시 2011년식 할리데이비슨 로드글라이드커스텀을 타고 있었다. 배기량 1700cc, 신차 가격이 3500만 원 정도였고, 2014년 당시 중고 시세가 적어도 2700만 원 정도였다. 그해 추석 때였다. 해가 질 무렵에 가야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아버지 스쿠터(대림 포르테125cc)의 굉음이 집에까지 들렸다. 아마도 구동계 어느 부분이 망가져 있었던 듯했다.

멀리서부터 그 소리가 들리자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너그 아부지 오시는갑다. 오토바이가 고장이 났는지 동네가 시끄럽다. 니가 오토바이방에 맡기든지 해서 저것 좀 고쳐주라. 너거 아부지한테는 아무리 고쳐 타라고 해도 안 된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3000만 원이 넘는 오토바이 타고 폼나게 다니는데, 그 아들을 낳고 고생해서 키워준 아버지는 겨우 80만 원짜리, 그것도 오래 타서 고물이 된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말이 되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가야읍내 오토바이가게 사장한테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탈 새 오토바이 한 대를 갖고 오고 헌 오토바이는 가져가라고 했다. 추석 연휴 끝나자마자 새 스쿠터가 아버지에게 배달되었고, 나는 오토바이가게 사장한테 송금을 했다. 그 새 오토바이가 지금 창고 옆에 서 있는 오토바이다. 지금까지 5년 정도 탄 총 주행거리는 1만 9000km 언저리다.

대림 포르테125

정확한 시점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법 오래전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거제에서 사 왔다는 것이다. 중고를 사 왔는데 미리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약속을 정했다. 아내와 같이 차를 타고 거제 옥포까지 가서 서류와 오토바이를 넘겨받았다. 아내는 차를 타고 먼저 출발하고,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함안까지 와서 본가에 가져다주었다. 포르테는 클러치와 변속기어가 없는 스쿠터다. 아버지에게 스쿠터를 사준 이유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대림자동차에서 만든 시티100을 탔었는데, 이 오토바이는 반자동 변속 방식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클러치는 없지만 발로 기어레버를 눌러서 1단, 2단, 3단, 4단 순으로 기어를 올려야 속력이 붙는 방식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늘 3단으로만 기어를 넣고 다녔다. 그래서 출발 때 항상 힘이 없어서 느릿하게 움직였고, 속도가 조금 붙은 뒤에는 다른 오토바이들처럼 다녔다. 아버지가 늘 3단만 넣고 다닌 건 젊은 사람들처럼 빨리빨리 변속 레버를 조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교차로에서 작은 사고가 났다. 사고 내용을 가만히 따져보니 실제로는 상대방 차의 과속이 사고 원인이었는데, 아버지 오토바이가 교차로에 들어선 직후 속력 붙지 않은 채 느릿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아버지의 잘못이 더 많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한테는 아예 발로 기어변속을 할 필요 없이 손잡이에 달려 있는 스로틀만 당기면 잘 나가는 스쿠터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거제까지 가서 사 온 스쿠터가 포르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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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탔던 DH88과 포르테. /조재영 기자

대림 DH88·시티100

시티100은 아버지가 직접 새것을 구입했던 오토바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7~8년 정도 탔을 것이다. 시티100은 '사용폐지'된 채 지금도 문간채 헛간에서 녹이 슬어가고 있다.

그전에는 시티100 이전 모델인 DH88을 탔었다. 우리는 그냥 88이라고 불렀다. 88은 내가 산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산 것도 아니었다. 외가에 있던 것을 얻어온 것이었다. 외삼촌이 자형 타라고 갖다 준 오토바이였다. 혼다 커브, 대림 88·시티100·시티에이스110, 이런 종류의 오토바이를 통칭해서 언더본이라고 한다. 오토바이 뼈대 아래쪽에 엔진이 붙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언더본의 가장 큰 미덕은 내구성과 편안함이다. 기름 냄새만 맡아도 달리고, 엔진오일 대신 식용유를 넣어도 잘 달린다는 우스갯소리를 나돌 정도다.

우리 집에 있던 88은 내게도 한쪽 추억이 있다. 대학 시절이었을 것이다. 88을 타고 밭에 갔다가 나무다리를 건넜는데 그 뒤에 엄지손가락만 한 벌이 나타나 내 머리에 붙었다. 머리에 쏘이면 목숨을 잃거나 쇼크로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는 무서운 벌이었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작게나마 양봉을 했기 때문에 그 벌이 얼마나 무서운 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머리에 붙은 벌을 털어내려고 왼손을 휘두르면서 오른손으로는 스로틀을 당겼다. 순간 오토바이는 가속도가 붙으면서 길 밖으로 튀어 나가 논으로 떨어졌다. 나도 오토바이와 함께 논에 처박혔다. 다행히 빈 논이 아니라 벼가 한창 자라던 시기여서 벼와 논바닥에 고인 물이 완충 역할을 해주어서 다친 데는 없었다. 내가 2019년 현재까지 오토바이를 타면서 달리다가 자빠진 유일한 사고였다.

대림 택트

아버지의 첫 번째 오토바이이자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사드린 오토바이다. 물론 이 오토바이도 중고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친 뒤 입대 전에 휴학하고 창원에 있는 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말이 아르바이트이지 사실상 사내 협력업체 직원이었다. 일당으로 계산해서 월급을 받았는데 잔업이나 특근이 많을 때는 월급이 꽤 많았다. 27년 전인데도 80만 원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돈으로 검정색 50cc 중고 스쿠터를 사드렸는데 그게 대림 텍트였다. 그때는 대림자동차(2018년 대림오토바이로 사명변경)가 일본 혼다와 기술을 제휴하던 시절이었고, 텍트 역시 혼다 기술로 만들어졌다. 라이더들 사이에서 혼다의 미덕은 '내구성'으로 통한다. 그 때문인지 텍트는 2002년까지만 생산되고 단종됐지만 지금도 중고가 거래되고 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발은 '자전거'였다. 튼튼한 쇠로 만든 짐받이가 있던 '신사용 자전거'였다. 공무원들이나 학교 선생님들도 많이들 타고 다녔던 자전거였다.

택트를 끌고 가서 아버지에게 운전법을 알려드렸더니 금세 익혔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오시더니 아주 좋아하셨다.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뒤로 아버지는 항상 택트를 타고 나녔다. 삽자루를 뒤에 꽁꽁 묶어서 논에, 밭에, 산에 갈 때 타고 다녔다. 그 몇 년 뒤에 동네 아재들도 하나둘 오토바이를 탔는데, 아재들이 구입해서 탔던 오토바이는 대부분 시티100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다른 아재들에 비해 일찍 오토바이를 탔었다. 아버지는 동네 아재들 중에서 오토바이 '선구자'였던 셈이다.

지금, 동네 아재들의 선구자는 동네 아재들 대부분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보냈고, 선구자의 오토바이는 창고 옆에 일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선구자의 오토바이가 다시 달리기를 바란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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