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야 가뭄해결 위해 제방 축조, 소작농·지주 반대에도 강행
공사장 열악해 사망사고 잦아, 1932년 준공식 2만 명 모이기도

◇기념탑 비문의 내용은

고성군 대가면 대가저수지 제방에는 석조물이 하나 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고성군지>(2016년, 고성문화원)는 '대가저수지조성기념탑'이라 설명하고 있다.

앞면 위 돌액자는 '물의 은택이 1000년을 간다'는 '수택천추(水澤千秋)'가 가로로 새겨져 있고 아래쪽 돌액자에서는 본문 18행 341자에 이르는 한자가 내력을 일러준다. 1942년 준공 10주년을 맞아 지은 비문인데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이 우리말로 옮긴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농사짓기가 좋기는 하지만 가뭄을 쉽게 타고 때맞춰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 1929년 가뭄으로 백성들이 곤궁해지자 재계와 유지들이 경비를 내어 1931년 1월 16일 고성수리조합 창립위원회를 꾸리고 □□토지개량회사에 설계를 맡겼다.

3월 6일 조선□□□□□□□에 신청하여 31일에 인가를 얻은 다음 건설회사 가지마구미(鹿島組)에 맡겨 6월 1일 기공해 이듬해 5월 31일 완공했는데 42만9560원(나랏돈 21만949원)이 들었다.

아래로 26척을 파고 강철을 시공하여 제방을 축조하니 높이 44척, 길이 1146척이다. 집수면적 2026정보, 만수면적 87정보, 최저 수심 45척, 저수용량 1368정척(町尺)이다.

간선수로 2가닥 7838칸과 지선수로 5952칸을 안배하는 한편 철근콘크리트로 차수벽을 만들어 고성천을 가로지르고 바닥의 옛 보를 보수하여 880정보에 물을 넉넉히 댈 수 있게 되었다."

뒷면 '고성수리조합설치관계자방명(關係者芳名)'은 대부분 뭉개졌으나 군수 황윤동(黃潤東), 조합창립실행위원 이갑용(李甲用)·이판수(李判洙)·구유명(具有明), 공사중지조합역직원(工事中之組合役職員, 공사 당시 조합 임직원) 신진규(辛鎭奎)·이찬근(李燦根)·김종주(金鍾注)·구유명·박남주(朴南柱)·이갑용·정원식(鄭源植)·이판수는 알아볼 수 있다.

▲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고성군 대가면 대가저수지 제방에 세워진 조성기념탑을 살펴보고 있다. /김훤주 기자

◇소작농·지주는 반대, 노동자는 파업

비문에는 "좋은 시절 은혜로운 혜택이 적시고 비추니 백성들의 숙원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모든 농사가 영원히 복을 누리게 되어 크게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는 표현도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1931년 4월 10일 자 동아일보는 "당초 잘 모르고 동의서에 날인했으나 이해타산 결과 지주·소작인 300여 명이 반대 진정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주모자 모씨가 징역을 살까봐서 몰래 불살라 말썽이 되고 있다"고 했다.

소작농들이 군청에 몰려간 일도 보도했다. 저수지 구내의 80여 정보를 소작하는 30여 농민들이 이주 대책을 밝히라며 찾아갔다가 군청이 동양척식회사로 책임을 미루는 바람에 다시 동척 고성출장소로 갔으나 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는 사연이다.

이후 기공식은 5월 31일 덕선리 저수지에서 치러졌으나 이후 동아일보 8월 2일 자는 공사 도중에 파업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임금이 33전으로 하루를 벌어도 그날을 먹지 못할 만한 비참한 현상"인데도 "하루 5전씩 저금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29일 모두 파업을 단행했고 관리들이 5전이 과하면 3전씩으로 하라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밤에는 100여 인부가 떼 지어 시위를 해 순사까지 출동하여 극력으로 진압하였으나 용이히 해산되지 않았다."

▲ 대가저수지 수호탑. 고성수리조합의 후신인 한국농어촌공사 고성통영거제지사는 지금도 위령제를 지낸다. /김훤주 기자

◇죽는 일도 잦은 탓에 수호탑 건립

동아일보는 또 1932년 3월 29·31일자에 '고성수리조합 공사장 답사기'를 실어 열악한 현장 상황을 보도했다. "임금표준 환전제도 공사장 시설 및 주민의 생활 보장 등 모든 조건에 있어서 듣고 보는대로 총괄적으로 한 번 발표"했던 것이다.

"아침해가 뜨기도 전에 손발이 얼어 깨어질 듯한 추위를 무릅쓰고 나가면 점심시간에 한 시간을 쉴 뿐 날이 저물어 어둠을 헤치고 돌아오도록 소나 말에 지지 않을 정도로 죽을 힘을 다하여 일하나 소득은 불과 30전이다."

"30전의 표를 받아도 전표 교환을 하면 1전을 떼이고 또 저금에 3전을 떼이니 겨우 한 사람의 밥값이 될락말락 담배와 술은 생각도 못하고 삯을 받아오리라 움막집에서 기다리는 부모처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매일 임금 전표를 발행하였다가 5일에 한 번 돈으로 바꿔주는데 하루를 벌면 그날 전표로 물건을 사거나 현금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전표 매수업자가 한 장에 1전의 할인을 떼니 2중3중의 착취가 아니냐."

작업 환경도 좋지 않았다. "바위를 깨고 산을 무너뜨려도 표토(表土)를 벗기지 않고 중턱에서 황토를 쏟아내므로 토양이 붕괴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공비를 적게 들이려고 이렇게 위험한 작업을 시키니 부상쯤이야 말도 말고 사망도 비일비재라 한다.

10여 일 전에도 흙에 파묻혀 입원 치료를 하다가 한 사람은 죽었고 역시 토양이 붕괴되어 경북 청도에서 온 사람 하나가 즉사했다. 그래도 위험한 작업을 맡아야 5~6전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며 금방 죽은 자리라도 곡괭이를 메고 달려든다."

이와 관련하여 대가저수지조성기념탑 맞은편 산기슭에 조그만 시설물이 마련되어 있다. 수호탑이라는데 안에 작은 불상이 있다. 높이 3m가량으로 돌축대를 쌓고 콘크리트 기단을 받친 다음 벽체를 치고 6각형 삿갓을 씌웠다.

대가저수지 축조 과정에서 숨진 이들을 위로하고 무사고를 기원하기 위해 만든 건조물이다. 지금도 한국농어촌공사 고성·통영·거제지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7일에 제물을 진설하고 위령제를 올린다.

▲ 부산일보 1932년 10월 9일 자 3면 머리기사로 올라간 사진이다. 일장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제방과 산기슭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물 사정 좋아져도

1932년 10월 4일 오전 11시 저수지 제방에서 열린 준공식은 규모가 엄청났다. 부산일보 10월 9일 자는 "가을이 좋고 농사가 한가로워 조선 스모와 저수지 구경을 위하여 전에 없이 2만이나 모였다"고 보도했다.

물 사정은 좋아졌어도 보람은 농민에게 가지 않았다. 수확이 늘어도 그 이상으로 수세를 걷었기 때문이다. 1935년 11월 24일 자 매일신보는 "풍작 등을 이유로 수리조합비를 6할 올리는 안이 부결되었으나 과연 중지할지는 매우 주목된다"고 했다.

최헌섭 원장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저마다 달리 볼 수 있겠지만 기념탑은 대가저수지 조성 경위를 직접적으로 일러주는 유일한 기록이라는 역사성이 뚜렷하고 수호탑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음을 보여주는 기념물이 그곳에 세워져 있다는 장소성이 가지는 의미도 작지 않다"고 말했다.

기념탑과 수호탑은 관리와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경남도청의 근대건축문화유산(www.gyeongnam.go.kr/archi_heritage) 목록에도 빠져 있고 문화재로 지정·등록되어 있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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