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만 남은 신전 촘촘히 채운 공허함
고대 그리스 식민 도시, 폐허로 변한 아그리젠토

트라파니와 마르살라에서의 2박3일 일정은 순풍에 돛 단 로마의 5단층 갤리선처럼 지나 버렸다.

거의 밤을 지새우고 새벽 5시 30분에 트라파니 부둣가에 있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야반도주를 하듯 하지?"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누군가 이 모습을 봤다면 "쯧쯧" 하며 가련하게 봤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본 사람이 있었다.

이날이 일요일이라 트라파니(Trapani)에서 아그리젠토(Agrigento)로 오는 버스가 없기 때문에 팔레르모로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호텔에서 준 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어떤 영감 한 분이 오시더니 이탈리아 말과 손짓을 하면서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느냐고 묻는다.

팔레르모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고 하니 여기가 아니고 다른 곳에 있으니 거기로 속히 가라고 하셨다. 맙소사.

영감님의 옷소매를 붙잡고 나를 거기까지 좀 데려다 주시라고 사정을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훨씬 멀리 떨어진 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 주셨다. 그 컴컴한 새벽에 말이다. 답례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돈을 드릴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허리를 90도 숙여서 한국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 콩코르디아 신전, 가장 완벽한 모습이다. 이들 신전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계 이민자들이 와서 세운 것들이다. /조문환

◇인연, 다시 만나는 기쁨

다시 돌아온 팔레르모는 며칠 전 보다 더 다정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버스도 생각보다는 일찍 도착했고 기차도 정시에 출발을 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서유럽 할머니로 보이는 분 두 분이 내 자리 옆으로 오시더니 같이 앉아도 되겠느냐고 하기에 마치 내 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인심을 쓰듯 앉으시라고 하면서 자리를 권해 드렸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며칠 전 에리체에서 내려 올 때 한국 남자 여행객 한 사람을 만났었는데 며칠 동안에 한국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반가워했다.

가만 그 상황을 들어보니 그 남자라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내가 아닌가? 워낙 짧은 시간에 그것도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상황이 아니라서 서로가 잘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 남자라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 "이럴 수가 세상이 이렇게 좁나?" "그러게요. 세상 잘 살아야 하겠는걸요?" "참 재미있는 상황이에요 그렇죠?" "한국말에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좋은 인연인가 봅니다." "인연, 그것 참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이런 때 영어로 딱 맞는 말이 What a coincidence! 아닌가요?" "맞아요 딱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스위스에서 1주간 시칠리아에 여행 온 친구 분으로 76살의 스테파니(Stefanie)와 73살의 이바(Eva)라는 분이었다. 각각 프리랜서와 초등학교 교사를 40년간 역임한 후 현재는 여행과 손자 보는 일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었다.

팔레르모역에서 아그리젠토역까지 2시간 30분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대화 속에 이 분들의 인품과 식견,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지혜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신전 계곡

아그리젠토는 1927년까지는 지르젠티(Girgenti)라 불렸고 고대 그리스 식 이름은 아크라가스(Acragas)였다. 라틴식 명칭은 아그리겐툼(Agrigentum)이다. BC 6세기경에 그리스의 식민 도시로 건설되었는데 이때의 도시 위치는 지금의 신전 계곡 그러니까 폐허가 되어 버려 신전들이 쓰러져 있는 그곳이었다.

이곳에는 6개 정도의 신전이 있는데 그중에 2개 정도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무너져 내려 원래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콩코르디아 신전(Tempio della Concordia)과 헤라 신전(Tempio di Hera)이다. 이 두 개의 신전은 외형이 비교적 온전하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 신전은 고대 그리스 이주민들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개척할 당시에 지은 것들로서 2500년 정도가 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온전하면 오히려 이상하다. 이 정도로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에 신들은 모두 사멸해 버리고 그 이름과 살았던 흔적만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 신전계곡 아래 들판과 도로. 신들의 고장이었던 신전계곡은 '철시'되었으나 그들을 섬겼던 인간의 도시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영악한 인간

그 험한 세월 동안에 그들을 섬겼던 인간은 이들과는 정반대로 번영에 번영을 거듭해 오히려 신의 경지에 이르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신들이 멸망해 버리자 인간들은 이들을 배신(?)하고 더 높은 곳으로 이주했다. 그러니 지금 그곳은 사체와 같은 신전이 널브러져 있다. 인간은 늘 그렇다. 자신에게 이득이 없으면 곧바로 마음을 바꿔 먹는다. 어쩌면 아크라가스의 신들은 인간의 배신으로 멸망했을 수 있다. 인간은 늘 불멸 할 것처럼 영악하다.

콩코르디아 신전과 헤라 신전은 야간에 조명이 들어오기에 사진을 찍기 위해 택시를 불러 다녀왔는데 이미 문이 닫힌 상태라 멀리 언덕에서 찍을 수밖에 없다. 출발 전 식당에서 예약 해 줄 때는 15유로에 가기로 했었는데 막상 택시에 올라타니 기사가 미터기로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은 25유로. 멀리서 찍어야만 했기 때문에 사진의 품질도 좋을 수가 없었다. 이 밤에 수고한 기사에게 좋은 일 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불과 231년 전의 일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신전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었다. 괴테 앞에 서 있는 신전들은 모두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왔겠지만 그는 그 폐허를 두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굳이 폐허 앞에서 폐허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오직 콩코르디아 신전을 건축했던 건축자들의 예지력과 배려심을 느꼈다. 후손들이 보다 용이하게 관리하도록 마무리 칠을 한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무너져 폐허가 되었기에 그 속에서 인간성을 보았다. 그 속에서 정을 두드렸을 강한 건축자들이 보였다. 힘없는 신들과 함께 말이다.

▲ 헤라클레스 신전.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

여행은 과정을 생산해 내는 또 하나의 과정이다. 결과만을 원한다면 다른 여행자들이 다녀온 책이나 사진을 통해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그 과정 속에는 대부분 사람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장 그립고 사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따질 필요조차 없어진다. 사람 그 자체로 만족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아그리젠토행 열차에서 만났던 두 분과 다른 여행지에서 만나 주소를 알고 있는 여행자들과 지나온 숙소 주인들에게 모두 메일을 보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답장이 왔다.

좀 오랜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세월에 따라 그 수명이 다해 버리고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는 신들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이들에 대해서는 앞뒤를 제대로 재 봐야 한다. 제대로 된 신인지, 내가 섬길 만한 성품과 능력을 소유했는지, 영원성이 있는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등을 꼼꼼히 알아 봐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인생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아그리젠토에서 만난 신들은 일찍이 세월이 평가를 해 주었기에 내가 다시 측량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들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0.001그램의 무게도 구분해 낼 수 있는 황금 저울을 쓸 것이다. 하지만 신들보다 더 영원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흥정도 할 수 있고 눈금도 조금 틀릴 수 있는 소매상 저울을 쓸 것이다. 이 두 개의 저울을 아그리젠토에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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