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서점 '종이약국' 인기
사연 읽고 맞춤형 책 추천
취업 등 고민에 조언 건네

고민이 생기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흔히들 지인에게 SOS를 친다. 이야기를 하고 나면 마음은 한결 가볍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찜찜함이 남아있다. 괜히 말했나 싶기도 하고, 그냥 잠이나 잘걸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서점에서 '책 처방'을 받아보자.

요즘 동네서점을 중심으로 책 처방이 인기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약을 처방해주듯 책 처방은 서점주인이 손님에게 맞는 책을 추천해준다. 일종의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문학치료)다. 그리스어인 비블리오테라피는 책·문학과 병을 고쳐주다를 합친 용어다. 책 처방 발원지는 지난 2016년 서울에 문을 연 '사적인 서점'. 정지혜 대표가 손님과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고 큐레이팅 기간을 거쳐 책과 편지를 택배로 전달한다. (현재 시즌1 영업 종료) 입소문을 타면서 다른 서점과 책방도 책 처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 진주시 평거동 진주문고 3층에 마련된 종이약국. 사람들이 엽서에 고민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책 전문가들이 책을 처방한다. /이병진

◇"책은 훌륭한 치유매체다" = 진주문고는 지난해 11월, 3층에 종이약국을 열었다. 사람들이 엽서에 고민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책 전문가들이 책을 처방한다. 모든 사연은 익명으로 받는다. 단, 처방전은 사연이 선택돼야 볼 수 있다. 매장 한편에는 그간 책 전문가가 처방했던 책이 전시됐다. 아무개 님의 사연과 함께 처방책, 증상, 효능, 용법,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 언급되어 있다.

종이약국을 제안한 이는 2층 여서재(문화복합공간) 이윤호 씨다. 그는 "우리가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우울증이나 분노조절장애 등 현대적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며 "책과 서점은 훌륭한 치유매체며 더욱이 다양한 현대인의 질병에서 책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처음 이 고민을 시작한 것은 <나니야 잡화점의 기적>과 <섬에 있는 서점>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문득 비블리오테라피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며 "무엇보다도 지역서점의 역할은 지역주민과 의미 있는 소통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넉 달간 종이약국 처방건수는 180여 건이다. 특히 종이약국은 첫 한 달간 엽서 100여 통이 접수돼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병진(34) 진주문고 팀장은 "문의 내용을 정리해 팀장과 직원들이 답변하거나 진주 소소책방·통영 삐삐책방 주인에게도 의견을 구한다"며 "모든 질문에 답변할 수는 없어서 월평균 20여 건의 질문을 골라 처방과 책 추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진주문고 3층 종이약국에 소개된 책과 사연들. /김민지 기자

◇진로가 고민일 때, 연애가 아플 때 = 진주문고는 종이약국 처방사례를 데이터화하고 있다. 분류, 닉네임, 성별, 나이, 사연, 추천책, 처방 순이다. 서점 방문객 중 절반이 학생이라 진로, 친구와의 관계, 연애에 대한 고민이 많다.

닉네임 돌하르밤♥은 <아우름> 문고를 처방받았다. 그는 "10대의 흔한 고민인 공부에서 벗어나고 싶다. 1년에 4번인 시험을 준비하려고 전년도부터 시험 전날까지 공부 하지만 기대치보다 시험점수가 낮아 스트레스가 많다"고 했다. 이에 종이약국은 "각 분야에서 성실히 자기 길을 걸어온 전문가들에게 '다음 세대에 꼭 한 가지만 전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라고 묻고 답한 내용을 엮은 <아우름> 문고를 추천한다. 영화음악을 만드는 히사이시 조, 기생충 박사 서민, 맹인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미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매력과 깊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끌리는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처방했다.

종이약국은 사랑에 상처받은 이에게는 시집 <연애의 책>과 정밀아 2집 <은하수>, 남자친구와 페미니즘 문제로 다툰 적이 있는 이에게는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추천했다.

이병진 팀장은 책 처방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고민이나 궁금증이 생겨서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도 결국 그건 내 밖에 있는 답이다"며 "정돈된 시간과 노력이 담겨 있는 책을 통해서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책을 읽으며 비슷하고 각기 다른 이야기를 접하며 공감 받기도 하고 객관화할 수도 있다"며 "책 읽기의 매력 자체가 책 처방이 활성화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한편 도내 창원 그랜드문고와 양산 세종서관에서도 상반기 종이약국을 시작할 예정이다.

▲ /진주문고 페이스북

■ 진주문고 종이약국 후기

"삶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사그라진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으니 "그럴 땐 시야를 좀 넓혀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라며 책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 <마녀체력>을 추천했다. 일과 삶이 별개의 영역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준다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면대면 방식이 아니고 익명으로 진행돼 부담감이 없다. 또 무료다. 단 자신의 사연이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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