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남쪽 문 곳곳에 서린 조선왕조의 위엄
국가권력 상징 광화문, 웅장한 석조구조물 돋보여
'보조 궁궐' 창덕궁 돈화문, 문 개수 늘려 위세 강조

▲ 경복궁 광화문. 조선시대 모든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조선왕조의 상징이다. 웅장한 석단 구조물에 3개의 출입시설이 있다. 2층 건물도 크게 세 칸으로 구성해 고대 동아시아 전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형균

◇공간의 구조

지금까지 목조건축의 여러 요소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건물 하나만 덜렁 만들어놓고 거기서 사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우리가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건물과 다른 요소들이 어우러진 공간이 필요하다. 건물 하나를 올리는 일은 걷기로 말하면 걸음마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걸어가야 하니 이번 주부터는 건축에서 걷고 뛰는 일, 즉 공간을 만들어 보도록 하자.

건물을 짓는 목적은 다양하다. 일상생활도 해야 하고, 주민자치센터같이 여러 사람이 관련된 일을 할 곳도 필요하다. 공부도, 종교활동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지 대부분 큰 틀은 비슷하다. 일단 중심이 되는 건물이 있고 담장 같은 구역을 나누기 위한 시설을 더해 하나의 단위를 만든다. 그리고 이 단위들을 목적에 맞게 배치해서 전체 공간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비슷하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가든 그 공간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고, 개울 같은 시설물로 정서를 환기시키며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대부분 그 마지막 집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의 특징은 바로 그 집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궁궐조성의 원칙

국가를 상징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선 어떤 일을 고려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 국가의 위상과 성격을 누구나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비슷한 문화권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전례에 따르면 일단 왕이 거주하는 공간(궁궐·宮闕)을 가운데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다(중앙궁궐). 그리고 왕의 공간은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생활하는 공간, 업무를 보는 공간, 의례를 위한 공간이다. 의례를 위한 공간은 외부와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 가장 바깥쪽으로 만들었고, 생활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니 가장 안쪽으로 배치했다. 그 구역에 도달하려면 천자는 다섯 개, 왕은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문에 있는 출입구의 숫자 역시 황제는 다섯 개(오문·五門), 왕은 세 개(삼문·三門)를 둘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의 궁궐을 만드는 데는 출입문 세 개와 세 개의 공간을 가져 삼문삼조(三門三朝), 황제는 문만 두 개 더 설치해서 오문삼조(五門三朝)가 원칙이었다.

▲ 경복궁 근정문. 경복궁에 있는 세 개의 주요 문 중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이다. 3문(三門)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광화문과는 달리 목조건축만으로 만들었다.

◇궁궐의 정문

가장 먼저 사람들이 접하게 될 문을 만들어보자. 궁궐의 규모는 민가 수준이 아니라서 문은 여러 개 필요했다. 이 경우에는 주로 방위를 따라 동서남북 네 개의 방향에 문을 만들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문은 남쪽에 있는 문이었다. 왕은 항상 남쪽을 보면서 북쪽을 등지고 앉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남쪽을 바라보는(남면·南面) 사람이었고 신하는 그런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엎드리는(북대·北帶) 사람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남쪽 문은 무언가 달라야만 했다.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규모를 키우거나, 사용하는 재질을 바꾸는 방법이 있었고 대부분의 궁궐은 두 가지 다 사용했다. 먼저 재질을 보자. 궁궐 정문을 만들면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나라가, 이 궁궐의 주인이 오래오래 지속하는 것이다. 이런 소망에 부합하면서 건축에 사용할 수 있는 재료는 돌이었다.

조선왕조 중심 궁궐이었던 경복궁을 보자. 경복궁 남문의 이름은 광화문이다. 광화문 아랫부분은 커다란 돌로 만들었다. 그 위에 목조건물이 올라가 있다. 돌 부분만 봐도 일반 건물보다 높은 규모이다. 게다가 이 구조물 위에 올라앉은 목조건물도 남다르다. 앞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 좌우로 길게, 그리고 높이를 강조하기 위해 2층으로 만들었다. 지붕도 만들기 가장 어려운 우진각을 선택했다. 지붕의 모든 모서리는 하얀 회로 마감을 했고 건물 전체에도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했다. 이런 방식은 서울 도성의 남쪽 문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쪽은 궁궐의 정문이 아니어서 출입문을 하나만 만들었다.

현재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창덕궁 돈화문도 살펴보자. 창덕궁은 처음에는 경복궁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격을 약간 낮췄다. 그래서 돈화문에서는 광화문 같은 하단의 석조구조물이 없다. 그래도 무언가 달라야 하니 다른 쪽에서 위세를 강조했다. 문의 개수다. 돈화문은 정면 5칸 건물이다. 이곳을 다 개방하면 5문을 가진 시설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바깥쪽 두 개는 막아 실제 통로는 세 개만 확보한 형태를 취했다. 조선은 오문(五門)을 만들 수도 있는 나라라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 창덕궁 돈화문. 광화문과는 달리 석축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쪽 문의 이름

남쪽 문은 일반적으로 오문(午門)이라고 불렀다. 12간지에 의한 구분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자(子)를 중심으로 해서 시계처럼 12지를 배열하면 3시 방향은 묘(卯), 6시 방향은 오(午), 9시 방향은 유(酉)가 된다. 자가 북쪽이니 그 반대쪽인 오는 남쪽이 된다. 그래서 남쪽 문을 오문이라고 불렀다. 서쪽은 9시, 동쪽은 3시 방향이 된다.

방위에 따라 붙이는 또 다른 방식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四神)을 이용하는 것도 있다. 각각 동서남북 순으로 담당한다. 동쪽은 푸른(靑) 용(龍), 서쪽은 하얀(白) 호랑이(虎), 남쪽은 붉은(朱) 봉황(雀), 북쪽은 검은색(玄) 거북이(武) 같은 서수가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도성의 가장 번화한 남쪽 길은 주작이 지키는 큰길, 주작대로라고 불렀다.

한 발만 더 나가보자. 5방 개념은 5행과도 관련되었다. 5행은 인·의·예·지·신이다. 동서남북에 똑같은 순서로 활용된다. 동쪽은 인(仁)방이고 서쪽은 의(義)방, 남쪽은 예(禮)방, 북쪽은 지(地)방이다. 그래서 한양도성 남쪽 문은 '예' 자를 이용해 숭례문이라 지었고, 동쪽 문은 '인' 자를 이용해서 흥인지문이라 했다. 같은 원리로 서문은 돈의문이라 했다. 그러면 마지막 다섯 번째 신(信)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금은 제야의 종으로 유명한 보신각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궁궐의 정문은 이름에서 방위와는 다른 공통점이 있다.

태조 대에 지은 경복궁의 남문은 광화문이고, 태종 대에 만든 덕수궁과 창경궁은 각각 돈화문, 홍화문이다. 모두 화(化)자가 들어간다. 임금이 열심히 노력해서 덕으로 백성을 감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빛(광화·光化)과 덕(돈화·敦化)을 이용해서 널리 교화(홍화·弘化)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문의 이름만으로도 신진사대부들이 어떤 마음으로 조선왕조를 세웠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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