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진주시민모임 학술대회서
근대 사회운동 전개 과정 짚어

역사진주시민모임이 지난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진주3·1운동을 다시 돌아보다'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진주 3·1운동이 1920년 전국 최초의 소년회와 1922년 소작인대회, 1923년 형평사 창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되짚었다.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진주지역 근대 역사와 3·1운동'이란 주제로 저항 거점으로서의 진주와 19세기 후반 이후 진주에서 저항운동과 그 변화에 대해 발표했다.

김 교수는 "진주는 여러 세력의 저항 배후역할을 한 지리산을 끼고 있어 진주 주민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남명학파와 진주 주민의 과격하고 저항적인 기질은 임란 때 의병활동이나 진주성 전투에서 발현되기도 했다"면서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불온시되면서 진주 사람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더 저항적인 성격을 지니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후 1862년 농민항쟁이 일어나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도 진주는 경상도 지역 동학군 봉기의 중요 거점 역할을 했다. 1896년 일제의 침탈에 저항하는 의병투쟁 때도 중요한 거점이 됐고, 1907년 을사늑약 직후에도 항거 조짐이 있었다"라고 밝혔다.

김중섭 경상대 교수는 '진주지역 3·1운동과 근대 사회 발전'이란 주제로 1920년 이후 진주 지역에서 생겨난 다양한 사회단체들의 활동을 되짚어 보았다.

그는 "3·1운동 이후에 진주지역에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는데 첫째는 신분이나 사회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누리며 사는 평등사회였고, 둘째는 일한 만큼 대우받고 모든 일이 공정하게 처리되는 정의로운 사회였다"면서 "이처럼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바탕에는 전통사회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바람이 있었다. 그것은 평등사회·정의사회였다"고 밝혔다.

토론자로 나선 조창해 역사진주시민모임 상임대표는 "진주 3·1운동은 다른 지역보다 인구 대비 참여도가 높고 참여계층도 다양했는데, 이는 임란 때 군관민 6만 명이 모두 죽음 당한 역사적인 경험이 진주사람들의 정신속에 전승됐으며 종교계의 역할, 신식 교육기관의 존재, 다른 지역에 비해 사전준비가 조직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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