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존여비사상 강했던 사회 속 공식기록서 빠진 당시 그들 
 

지난 한 달, 나는 늑골 골절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TV에서나 봤던 CT, MRI 촬영을 하고, 늑골 골절로 인한 심장손상을 알고자 심장초음파까지 해야 했다.

모든 검사 후, 나는 약 3주간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등이 침대와 일체형이 되어 누워있었다. 첫날에 욕창 안내장을 주었는데, 누워 있어보니 서명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골절 당한 첫날은 말하거나 웃기만 해도 뼈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아팠는데 의사선생님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으니 조금씩 고통도 감해졌다.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의 모습과 마음으로 보낸 날들이었다. 아직도 힘든 일을 하면 아프긴 하나, 이제 퇴원도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이 글을 쓰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독립운동의 고통

병원에 있는 동안 올해 100주년이라고 하는 3.1절을 보냈다. 나는 그 시간에 '고문 휴유증'으로 형무소에서 사망하거나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릴 때 역사수업을 좋아해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나름 관심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지식적인 면에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안 건 껍데기였다. 일제시대 고문은 악랄하기로 유명하다. 유관순 열사가 당했다는 손톱을 뽑거나 귀와 코를 자르는 고문과 입에 차마 담기도, 생각조차 고통스러운 수많은 고문들, 이는 유관순 열사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겪었을 것이다.

내 몸의 아주 일부인, 늑골이 2개만 부러져도 약 3주간 편안한 공간에서 가만히 있어야 나을 수 있는데 차디찬 감방에서 몽둥이로 온몸을 맞아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려도 제대로 된 치료한번 받지 못해 생긴 '고문 후유증'을 나는 온몸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박헌영 선생님은 심한 고문으로 정신착란 증세로 벽을 보고 이야기하거나 자기가 싸놓은 똥을 벽에 칠하거나 먹기도 하는 등의 정신이상 증세로 병보석으로 출감한 이야기도 있다. '고문 후유증'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고통의 역사다.

◇여성독립운동가

나는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유관순, 김구, 윤봉길 등 드러난 공훈이 있는 사람들이 아닌 아직도 당시 독립운동 기록을 찾지 못하는 등으로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보았다.

전체독립유공자 1만 5511명 중 여성은 433명으로 전체의 2.8% (공훈전자사료관 2019년 3월 기준)에 해당하는 적은 숫자,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은 근거 기록이 없거나 명예를 되찾아주려는 후손이 없는 등 여러 가지 사유로 아직까지 외면 받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을까? 정운현 작가가 쓴 <조선의 딸, 총을 들다>라는 책에 보면 1919년 3·1혁명 이전에는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이 주류였고 혁명기에는 만세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 수원기생 김향화 등이 있다.

그 이후에는 다양한 분야와 형태로 투쟁이 이루어진다. 노조활동, 의열투쟁, 근우회, 애국부인회 결성 등의 활동적인 투쟁, 그러나 독립투쟁의 대부분은 남성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거나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가정에서 며느리, 주부, 아내, 엄마, 시부모 봉양, 가사노동, 경제활동, 남편의 옥바라지 등을 감내하는 역할을 병행하며 독립군 군복제작 및 선전지 작성, 도피자 은닉 등 다양한 형태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남존여비사상이 강했던 그 당시, 여성들의 독립운동 행태는 '독립운동'이라는 관점보다 '여성의 당연한 삶'으로 인식되었다. 그녀들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 오래된 관습이었던 부창부수, 여필종부의 관점으로 여자가 남편, 아버지, 아들을 따르는 것을 당연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실정이라는 것이다. 인식 개선이 상당부분 이루어졌다는 지금도 여성 독립유공자 현황은 빈약하기 이를데 없다. 밥을 짓고 옷을 만들고, 알려진 독립운동가의 도피처를 조성하고 청사 폭파를 위한 폭탄을 운반하는 행위들은 공식기록으로 남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월북을 했거나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분단 체제의 폐해는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지 모른다.

▲ 7일 경기도 고양시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열린 한국여성독립운동가 특별기획전에 전시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과 독립운동사를 기록한 디지털 책들. /연합뉴스

◇마산 여성독립운동가 '김명시장군'

여성독립투쟁에 대한 내용을 다룬 정운현 작가의 책 중, 내 눈길을 끈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경남 마산부 만정 189번지에서 1907년 태어난 '김명시 장군'에 대한 이야기다. 그분은 작년 9월에 필자가 쓴 '약산 김원봉' 선생님의 인생과 비슷한 항일운동을 했고 약산처럼 마지막은 쓸쓸했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간 김명시 장군은 서울 배화고등학교에 입학하나 학비문제로 중도에 그만두고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다니며 항일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국내활동을 위해 본국에 입국한 뒤 얼마되지 않아 동지의 배신으로 불과 두 달 만에 체포된다. 이 일로 조봉암 홍남표 등과 함께 6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분의 기록은 아니지만 조봉암 선생님의 감옥살이에 대한 증언은 다음과 같다. "추위 고생이 제일 컸다. 떨다가 떨다가 지쳐서 잠든 사이에 슬그머니 얼어 죽으면 네모난 궤짝 속에 넣어서 파뭍었다." "자고 일어나면 사방 벽면에 오부씩이나 될 만한 두께로 하얗게 성에가 슬어서 마치 사명당의 '사처방' 같았다."

아마 김명시 장군도 이러한 상황을 똑같이 견뎠을 것이다. 7년 만에 출옥한 장군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대열에 합류한다. 조선의용군에 합류해 최전선에 배치돼 선전전을 펼치고 해방까지 조선독립동맹 화북책임자, 북경책임자 등을 지냈다.

김명시 장군은 해방 후 전국부녀총동맹 중앙 대표이자 선전부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다 1947년 8월 '8·15 폭동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되었다가 그해 11월 미체포 상태에서 기소중지가 되었다. 그러나 2년 뒤 1949년 동아일보에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 유치장서 자살. 수일 전 모종의 혐의로 부평경찰서에 구금 중이던 바, 지난 3일 하오에 자기 치마를 뜯어가지고 감방 천장 수도관에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고 한다"라는 기사가 났다. 증언에 의하면 "자살이 아니라 고문치사일 것이다. 확고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 쉽게 자살할 리 없다"는 이야기로 의혹도 제기되었다. 1946년 11월 '여류혁명가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나온 독립신보에 김명시 장군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열아홉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입니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 하다 해방된 조국에서 4년 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김명시 장군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잊힌 그들의 삶, 기록으로 증언

3·1혁명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전국에서 각자의 형편대로 추모행사가 열린다. 경상남도기록원에서는 '근현대사 기록물 수집'사업을 통해 여성, 아이들 등 독립운동에서 소외된 자들의 기록을 찾기로 했다. 앞에서 서술한 다양한 독립운동의 형태를 통한 여성 독립운동가, 경남 출신 독립운동가이나 월북했다는 이유 등으로 공훈을 인정받지 못해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국가적인 공훈의 수여를 떠나 그 공적을 알리려고 한다. 경남도내 일제강점기 수형인명부, 범죄인 명부 등의 자료조사와 더불어 시대를 함께했던 사람들의 구술증언 등으로 후손인 우리가 그분들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 '명예'를 기록하고 증언하여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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