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 경남대 명예교수 마산YMCA 아침논단 강연

"3·1운동은 피지배층과 지배층이 함께한 전 민족적 운동이었다. '민족'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김봉렬(사진)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19일 마산YMCA 아침논단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강의했다.

김 교수는 3·1운동이 이전 동학운동·갑오개혁 등과 다른 점에 대해 '아래로부터 변혁과 위로부터 개혁'이 합쳐졌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3·1운동에서 민중의 힘을 직시한 지식인층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고자 했으며,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 수립,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헌법 전문을 읽으며 "대한민국의 근본은 3·1운동에서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마산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났다. 진동·진전·진북면에서 2차례 만세 시위가 이어진 4·3삼진의거다. 1919년 3월 28일 진동 고현시장 장날 첫 번째 의거가 있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가운데 6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헌병경찰·마산중포병대대 등 병력이 동원돼 다수의 군중이 체포됐으며, 11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4월 3일 두 번째 의거 때는 진전면 시위대 2000명에다 진북·진동면 시위대 1000명이 합세했다. 8명이 순국했으며, 22명이 다쳤다.

김 교수는 "지역민들이 혼연일체돼 장날에 계획적으로 벌인 시위"라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역전되는 양상이 나타났지만 문화적으로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가졌었기에 여느 식민지 국가보다도 민족 저항이 심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대내외적으로 자주국가 건설을 선포한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3·1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됐으며, 비폭력 저항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 해외 독립운동도 본격화됐다.

3·1운동 100년째, 해방된 지 74년째이지만 친일청산은 여전히 숙제다. 김 교수는 "미래지향적 민족주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 특히 친일파 문제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이용되는데, 그러면 100년이 돼도 해결하지 못한다"며 "역사가에 의해서 역사에 기록되는 것으로 그 인물을 도려내야 한다"고 밝혔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