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대산면·김해 진영읍 일제강점기 수리시설 존재
보·다리·양배수장·농로 등…전문가 통합 보전 제안

일제가 창원시 의창구 동읍·대산면과 김해시 진영읍 일대 황무지를 개간하여 주남저수지를 축조하고 대산평야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주천갑문과 주남교 수문이 최근 경남도민일보 보도로 알려졌는데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수리시설이 이 밖에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거나 무심하게 넘겼지만 독특하게도 창원 동읍 판신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김순재(56) 동읍농협 전 조합장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그것들이 담겨 있었다.

주천강을 중심으로 하는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가 김 전 조합장에게는 어린 시절 놀이터이고 통학로였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찍 주천강 둑길을 4km가량 걸어서 진영역까지 간 다음 열차를 타고 창원역에 내려 창원경상고등학교에 등교했다. 그리고 지금은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를 생활 터전으로 삼아 농사를 짓고 있다.

17일 김 전 조합장과 주천강 제방을 따라 길을 나섰다. 김 전 조합장은 "거의 30년 만에 처음 가본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골목과 길모퉁이에 모두 능숙했다. 하류 2km까지 내려갔더니 먼저 다리가 보였다. 창원시 쪽 지번으로는 의창구 대산면 제동리 471-65이고 김해시 쪽은 진영읍 좌곤리 717 근처가 된다.

▲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제동리 471-65와 김해시 진영읍 좌곤리 717 근처에 걸쳐져 있는 일제강점기 다리. /김훤주 기자

콘크리트 구조물인데 자동차는 다니지 못할 정도로 너비가 2m 정도, 길이는 50m가량 되었다. 김 전 조합장은 말했다. "요즘에는 이런 다리가 없다. 난간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데 옛날에는 이랬다. 다릿발 모양을 보면 옛날 주남저수지 수문의 하부와 비슷하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이유다."

이어 200m 아래로 내려갔다. 주천강 흐르는 물속에 콘크리트로 만든 보(洑) 시설이 있었다. 창원 대산면 제동리 415-28 태산유압 공장 뒤편과 김해 진영읍 좌곤리 743번지 논 근처가 된다. 1m 남짓 간격으로 일곱 개가 있는데 너비는 50cm, 길이는 1m 정도였다. 뒤집어쓴 덤불을 헤치고 보았더니 홈이 파져 있는데 널빤지를 끼워 넣었지 싶다. 일제 강점 이전에는 콘크리트가 없었다.

▲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제동리 415-28 태산유압 공장 뒤편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보. /김훤주 기자

물 위에 드러난 높이는 60cm 정도 되었고 물 아래 깊이는 재어보니 70㎝가량이었다. 하지만 뻘흙이 많이 퇴적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 깊이는 이보다 깊을 텐데 하지만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 전 조합장은 동판저수지 안에도 같은 시설이 하나 더 있는데 지금은 물에 잠겨 볼 수 없다고 했다. 동판 들머리에서 여기까지는 1km 남짓 된다. 이 정도 길이에서 상류와 하류에 이처럼 보를 만들어 물길을 가로막고 주변 농경지에 물을 대었다는 얘기다.

김 전 조합장은 "1912년 만든 주천갑문이 하류 4km 지점에 있다. 주천갑문으로 물을 채우면 이런 보는 쓸모가 없다"며 "이런 까닭으로 주천갑문을 만들기 이전 일제가 대산평야를 최초로 개척하던 시기의 시설물로 여겨진다"고 했다.

김 전 조합장은 다시 하류로 2.4km가량 내려갔다. 먼저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길 것 같은 야트막한 자리에 다리가 하나 있었다. 진영공설운동장과 김해시청소년수련관 뒤편인데 앞에 본 다리보다 2m 이상 낮은 데 자리잡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겉모습이 새로 만든 것 같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니 그냥 옷을 입힌 정도였다.

▲ 일제강점기 지어진 장구산양배수장. /김훤주 기자

건너편에는 양배수장(김해시 진영읍 진영리 665-34)이 있는데 이름은 '장구산'이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준공이 1945년으로 되어 있었다. 김 전 조합장은 겉모습만 보고도 "저것은 일제강점기 지어졌다. 요즘은 저런 모양으로 짓지 않는다"고 했는데 바로 맞았다. '1945년 준공'은 뚜렷한 기록이 없어서 해방 이후에 그렇게 적었을 뿐 그 이전 일제강점기 어느 한 때라는 뜻이다.

이렇게 둘러보고는 다시 주남저수지 수문 있는 데로 올라왔다. 1976년 지어진 현재 수문에서 도로를 건너면 주천강 방향 20m 지점에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창원토지개량조합(한국농어촌공사 창원지사) 기록을 따르면 1924년 준공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위에 간이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어 과연 적절한 위치인지 논란이 일고 있다. 지은 지 100년 가까운 문화재급 시설물인 데다 보기도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창원시청 주남저수지사업소는 이에 대해 "주민 민원도 있고 해서 다른 데로 옮기기로 했다. 하지만 시일은 좀 걸릴 것 같다"고 답했다.

김 전 조합장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동으로 수문을 여닫았는데 우리가 힘을 보태면 직원들이 먹을거리를 주었다. 그때 어른들은 만든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끄떡없다며 '왜놈'들이 참 튼튼하게 지었다고들 말하곤 했다."

김석철 건축사(창원 지에스건축사사무소 소장)에게 수문 사진을 보였더니 "같은 시기에 만든 구조물이 아니다. 하부는 주남저수지를 처음 축조할 때 만들었다면 상부는 이후 어느 시기에 새로 설치했다. 다만 공법 등을 보면 거의 비슷해서 만든 시기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듯하다"고 했다.

▲ 주남저수지 옛 수문 위에 들어선 간이화장실 두 채. /김훤주 기자

주천강 물길 말고 들판에도 일제강점기 농업유산이 남아 있었다. 주남저수지에서 물을 빼내는 배수로 위에 걸쳐져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 쓰는 농로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쓰는 수로였는데 너비는 1m가 되지 않았고, 길이는 6m가량 되었다.

농로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월잠리 88-43번지 논에, 수로는 동읍 월잠리 81-6번지 논에 붙어 있었다. 김 전 조합장은 "동읍에 이렇게 두 개 남아 있다. 대산면은 70년대에 대대적으로 경지 정리를 하는 바람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18일 "여태 근대농업유산이라 하면 전북 군산시나 옥구군 이런 데나 주목을 받았지 창원은 아무 취급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제강점기 수리시설 등이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 일대에 많이 확인되었으니 앞으로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주남저수지가 생태자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런 평가도 받지만 따지고 보면 근본은 대산평야를 위하여 만들어진 홍수 조절·가뭄 대비 시설로 농업자원이다. 이 두 측면을 모두 보아야 하지 하나만 갖고는 반쪽밖에 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유 교수는 또 "이를 위하여 창원시청은 이런 시설물을 모두 근대 시기의 중요한 농업유산으로 인식하고 관리·보전할 필요가 있다"며 "표지판도 세우고 책자도 발행하는 등으로 홍보하면 관광자원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얘기했다.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도 "앞서 발견된 주천갑문이나 주남교 수문도 하나같이 중요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남저수지·대산평야 조성과 관련한 역사적 의미를 더욱 뚜렷하게 새기려면 이번에 존재가 확인된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보·다리·양배수장·농로·수로까지 모두 근대농업유산으로 인식하고 하나로 묶어 문화재로 지정·등록시키는 편이 낫지 싶다"고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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