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 교역·숙박시설 갖춘 장소
제덕만 인근서 유물과 함께 발굴
삼포왜관 중 유일하게 남은 유적
문화재위 '도문화재 지정'권고

조선 시대 최초 개항장이었던 진해 제포왜관 터가 확인됐다.

두류문화연구원은 "조선 태종 7년(1407) 개관해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운영된 제포왜관 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두류문화연구원은 지난해 진해 웅동지구 진입도로 개설 구간 인근인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321번지 일원 전체 9650㎡를 발굴 조사했다. 이 중 제포왜관 터는 제덕만과 인근 냉이고개 사이에 자리한 7302㎡ 구역이다.

이곳에서는 4개 층으로 조성된 대규모 계단식 지형이 확인됐다. 축대와 담장, 계단, 박석, 배수로(추정) 등 기단건물지 관련 유적뿐만 아니라 당시에 사용한 도자기, 기와 파편 등 유물 수백 점이 출토됐다.

▲ 진해 제포왜관 터 노출 후 객사 또는 관공서 추정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대지를 찍은 항공사진. /두류문화연구원

왜관은 조선시대 왜인들 교역과 숙박을 위한 시설을 갖춘 무역처다. 조선 왕조는 고려 멸망 원인 중 하나가 왜구의 준동임을 인식하고, 왕조 개창 초부터 화전양면책(和戰兩面策)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수군을 증강해 해상 토벌 작전을 수행하는 한편, 왜인들에게 교역의 길을 터 줘 준동을 억제하고자 왜관을 설치했다. 1407년 제포와 부산포를 개항하고, 1426년 울산 염포를 추가로 개항해 '삼포왜관' 체제를 갖췄다.

한데 중종 5년(1510) 4월 삼포 거주 일본인들이 성종 대 이래 엄격한 교역 통제와 연산군 대 운영상 모순에 불만을 품어 '삼포왜란'을 일으켜 조선인 272명을 학살하고, 민가 796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삼포왜관 폐쇄로 생계가 곤란해진 대마도주가 이시카와 막부를 통해 교역을 간청해왔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중종 7년(1512)에 제포만 다시 개항한다. 삼포 중에서도 제포가 당시 한일교류에 가장 중추적 역할을 한 셈이다. 이는 제포에 머문 왜인 수를 봐도 알 수 있다. 1494년 제포왜관에는 347가구, 왜인 2500여 명 머물렀다. 같은 시기 부산포왜관에 453명, 염포왜관에 152명이 머무른 데 비해 압도적인 규모다.

▲ 제포왜관 터 일대를 표시한 사진. /두류문화연구원

제포왜관은 진해 남산(184.5m)에서 서쪽으로 뻗은 구릉 사면부에 자리한다. 이곳은 북쪽으로 웅천읍성, 동쪽으로 웅천왜성, 서쪽으로 제포진성, 남쪽으로 제덕만 제포 수중목책 등이 자리해 있고 남해에 맞닿아 있다. 남쪽 바다를 제외한 곳은 산지로 이뤄져 있어 폐쇄적인 지형 구조를 지니고 있다.

조선 전기 성리학자 신숙주(1414~1475)가 쓴 <해동제국기>(1471)에 실린 '웅천제포지도'에 제포왜관과 토성이 묘사돼 있다. 이 지도에는 제덕만에서 웅천으로 이어지는 냉이고개 양쪽 구릉에 제덕토성이 가로지르고 있다. 냉이고개 남쪽과 해안으로 이어지는 왜관 남서쪽 고개는 량(粱)이라는 감시초소가 있어 제덕만과 왜관에서 웅천읍성이 자리한 내륙으로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두류문화연구원은 조선 정부가 이 같은 지형 구조를 이용해 제덕만 서쪽에 치우쳐 제포진성, 냉이고개 북쪽에 웅천읍성, 왜관을 둘러싼 북쪽 능선에 제덕토성을 쌓아 왜인들 운신을 제한하고, 주요 길목에 감시 초소를 둬 통제와 방어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포왜관 입지를 제덕만 동쪽 좁은 골짜기에 한정한 것도 왜인들 관리를 통제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

두류문화연구원은 또한 제포왜관 발굴지에서 5기 축대에 의해 조성된 대지 6면을 확인했다. 이 중 동쪽 해발 30.1m 지점 최상층 부에 객사 등 관공서로 추정되는 길이 24.6m, 너비 11.9m 규모 대규모 건물터를 확인했다. 이 건물은 양익형으로 어칸과 이에 남·북쪽으로 연접한 협칸으로 구성돼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추정된다.

▲ 이곳에서 발굴된 '대명정덕팔년춘조(大明正德八年春造)'라고 적힌 기와 유물. '정덕'은 중국 명나라의 제10대 황제인 무종(재위 1505∼1521년)의 연호로 1513년 봄에 만들어진 기와라는 뜻이다. /두류문화연구원

특히 이 건물터에서 '대명정덕팔년춘조(大明正德八年春造)'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됐다. '정덕'은 중국 명나라의 제10대 황제인 무종(재위 1505∼1521년)의 연호로 1513년 봄에 만들어진 기와라는 뜻이다. 이 건물은 적어도 삼포왜란 이후인 1513년 초축 또는 중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1407년부터 사량진왜변이 발발한 1544년까지 운영된 제포왜관의 설치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

이 제포왜관 터는 삼포왜관 중 유일하게 남은 왜관 유적이다. 부산포왜관과 염포왜관 터는 각각 부산진시장과 현대차공장으로 사용돼 유적지를 확인할 수 없다. 이에 최근 문화재위원회는 제포왜관 터를 경남도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문화재청은 제포왜관 일대 원형 보존 조치를 내렸다. 창원시도 해당 유적 보존에 필요한 조치에 나섰다. 창원시 관계자는 "15일 시 담당자들이 현장을 방문해 상황을 살피고 보존에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확인했다"며 "곧 시 문화재위원 자문을 얻어 구체적인 보존 방법을 고민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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