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제강점기에 지어졌거나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근대건축물이 세상에 드러났다. 김해에 있는 주천갑문과 창원 주남저수지 근처의 주남교가 그것이다. 갑문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주천갑문은 주천강의 수문 구실을 하는 것으로서 1912년에 조성되었다. 주천강은 주남저수지와 낙동강을 잇는 강이다. 주남교의 경우 대산평야와 주남저수지가 조성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주남저수지가 애초에는 치수 목적으로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건축물 모두 주남저수지나 대산평야와 관련된 경남의 생태 역사를 알려주는 근대기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런데도 주천갑문의 경우 최근까지도 인근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지금이라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일이 필요하다.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에서 주천갑문이 준공되기 이전의 사진이 남아있는 것도 확인되었다.

주천갑문이 조성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그 인근에 일본인 무라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촌정제방도 만들어졌다. 주천갑문과 촌정제방 모두 장마철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경남의 사회갈등 양상을 알려주는 사회역사적 유적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낙동강의 범람을 막은 덕분에 비옥한 대산평야가 확보됨으로써 소작인에 대한 지주의 가혹한 수탈을 낳았고 그것이 소작인들의 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자연 문제가 사회 문제로 바뀐 역사가 서려 있다. 1929년의 한 신문에는 촌정농장 소작인들이 일본농민조합과 연대하여 지주와 소작쟁의를 벌인 기사가 실려 있어 근대적 치수 관리가 계급 갈등의 격화로 탈바꿈한 역사를 증언해 준다.

오늘날 도민들이 혜택을 입고 있는 풍요로운 대산평야와, 습지와 생태관광의 보고로서 주남저수지가 일제강점기 당시만 해도 식민지 수탈이 가혹하게 자행되었던 비극적인 역사를 품은 사실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조명이 필요하다. 주천갑문과 주남교는 경남이 자랑하는 생태자원의 기원, 지주의 수탈, 소작인들의 저항 등 경남의 굴절된 근대 역사를 알려주는 문화재로서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