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나락으로 모는 2차 가해 여전
말하기·서울중심 넘어 더 치밀해지자

다른 나라에서는 정부가 모든 여성에게 꽃을 준다는 날, 나는 당사자로서 이웃 도시의 미투운동 행사장에 있었다. 지난 1년 동안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그동안 미투운동에 대해 대학, 정당, 기업, 재단, 공공기관 등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집단에서는 어김없이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피해자를 제지하고 외톨이로 만드는 게 주된 수법이었다. 진보정당에서도 조직적인 2차 가해로 피해자 괴롭히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부산시는 성폭력과 관련된 인물을 부산문화재단 대표로 임명했다. 안희정에게 1심 판사가 어떤 명판결을 내렸는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백래시(역습)를 통한 견고한 남성 연대의 확인'. 이날 미투운동을 이끌거나 지지한 여성단체들의 결론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날 저녁이나 다음날 아침 언론에 어떤 보도가 나올지 그려보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피해자가 무슨 말을 해도 자신들이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데 특출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바다. 지난해 미투 운동이 개시될 때도 그랬다. 가해자 실명을 언급했던 내 말은, 연합뉴스에서 '우는 여자'의 한풀이로 둔갑했다. 나는 슬픔을 떨치고 세상에 나온 피해자로 다루어졌다. 내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춰달라고, 가해자를 조명하지 않을 거면 기사를 쓰지 말라고 한 내 요구는 간단히 무시되었다. 피해자가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 확인하려고 구경을 왔거나, 피해자가 무력하고 약하고 허구한 날 피해를 떠올리며 운다고 단정 짓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개조시키는 것은 단념해야 할지 모른다. 한 언론사는 어떤 피해자를 다루면서 제목에다 피해자 실명을 떡하니 써놓았다. 정작 그 피해자는 인터뷰에서 가해자 실명을 거론했음에도 말이다. 항의하는 피해자에게 기자는 실명을 드러내지 않을 거면 뭐하러 인터뷰했느냐고 훈계했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야만 인정해주겠다는 것은 피해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2차 가해이다. 그러나 어떤 피해자든 성범죄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주인공은 가해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가해자에게 제 몫을 찾아주고 당당한 주인공의 자리를 부여하고 제대로 대접해 주고 싶다는 생각은 2019년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불가능한 꿈이다. 한국 사회가 보고싶어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빠졌는지 구경하고 싶은 관음증이며, 가해자는 무서워해도 피해자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 경향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날 기자회견의 제목은 '들어라, 우리가 말한다'였다. 1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국면은 피해자 말하기 대회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미 말의 봇물은 터졌다. 피해자들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여성계의 대응은 뒤에 처져 있는 듯한 건 나만의 느낌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미투운동부산대책위 등이 낸 보도자료 제목은 '부산에서 우리도 외쳤다'이다. 여성운동의 목표가 여성 지위를 남성만큼 올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닐진대,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체계에 도전하려면 서울을 중심에 놓고 지역을 곁가지에 두는 위계적인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서울이야 뭘 하든 각자 자신이 사는 고장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울까. '강남역살인사건'이나 '혜화역시위'가 미투운동의 대표성을 상징하는 현실이 나는 불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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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뒤에 안희정 살리기에 아내가 가세한 일이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려면 우리는 더 치밀해지고 단단해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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