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전쟁 지나간 자리에 보상처럼 남은 백리 소금길

자기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 명제라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의외로 수월할 수 있다. 하지만 도덕 교과서와 현실은 다르니 이것이 문제다. 선과 악 중 어느 것이 이기느냐에 대한 답은 오로지 신(神)만이 할 수 있다. 더 어려운 물음은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인가이지 싶다. 불행하게도 역사에서 선은 승리의 보증수표가 아니며 악은 패망의 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팔레르모라는 도시국가는 선과 악의 잣대를 대 볼 수 없는 사이에 카르타고를 물리친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는 이 공방전으로 단순히 전투에서 승리한 것 이상의 전과를 올렸으니 바로 '두려움'의 극복이었다. 코끼리에 짓밟힌 트라우마가 있었던 로마군은 코끼리 떼를 해자로 유인한 뒤 몰살시켰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운 이들의 성질을 이용했다. 코끼리 트라우마를 치유한 로마는 트라파니(Trapani)와 마르살라(Marsala) 공방전으로 이동했다. 이 공방전을 보기 위해 나는 역사의 현장을 따라 서부 해안으로 진행한다.

괴테는 그의 여정에서 트라파니로 가지 않고 팔레르모에서 곧장 남쪽으로 이동하여 알카모와 시아카를 거쳐 아그리젠토로 이동했다. 그는 콘코르디아 신전을 염두에 두었다. 장소가 바뀌었다는 것에는 의외로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다. 물리적 환경이 절대적인 것은 아닐 수 있지만 물리적 환경이 관념도 바꿀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에서 팔레르모로 이동한 그는 그 거리 이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집을 떠난 지 8개월, 시간과 거리를 넘어 그 자신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 트라파니와 마르살라 염전과 소금길. 극상품의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근 백리 정도 펼쳐져 있다. /조문환 시민기자

◇소금길

팔레르모 총독 궁전에서 만난 한 몰타 사람은 괴테가 바이마르에서 왔다는 말에 베르테르의 작가는 잘 있는지 물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하자 이 몰타 인이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하다. 바이마르와 팔레르모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남쪽나라의 어느 땅에서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와 있다. 멀고 먼 거리다. 그가 변했듯이 나도 변해 가고 있다.

나의 물리적 거리는 팔레르모에서 트라파니로 더 옮겨져 간다. 트라파니에 도착하자마자 케이블카를 타고 에리체(Erice)로 올랐다. 해발 700미터 정도 되는 요새다. 정상에는 고대에 지어진 비너스 성이 있다. 이 동네의 대부분 건물은 세월의 무게에 허물어져 있다. 주택들도 있기는 하지만 거주지로서의 기능은 끝난 상태로 몇몇 식당과 기념품 상점만 운영되었다. 내가 가 봤던 시에나나 오르비에또, 아시시와 스폴레토와 같은 유사한 도시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쇠락해져 있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트라파니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한편에 유럽 최대, 최고 품질의 소금이 생산되는 염전이 펼쳐져 있다. 트라파니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마르살라까지 그 염전이 이어져 있는데 두 도시를 잇는 길을 소금길 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소금길이 있다. 옛날에 남해에서 섬진강을 통해 소금과 수산물이 배에 실려 화개장터로 와서는 임산물과 물물교환 되어 지리산 벽소령을 넘어 함양 마천으로 넘어갔었는데 바로 이 길을 소금길 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으면 안 될 것이 소금인지라 어디나 이런 길들은 있을 것이다. 방송을 보니 티베트에도 이런 길이 있었다. 낙타나 말에 실려 며칠이고 암염(巖鹽)이 이동하는 그 길이 소금길 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마르살라까지 가는 소금길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마르살라에서 보는 트라파니는 하나의 완만한 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 바깥에는 몇몇 크고 작은 섬이 있는데 지도에 보니 위에 있는 것이 레반초 섬이고 아래에 좀 더 큰 것이 파비냐 섬이다. 좀 더 서쪽에 있는 섬이 마레티모 섬인데 이들을 묶어서 에가디 제도라고 한다. 약간 과장이 섞인 소리지만 이 섬에서 목마를 타면 바다 건너 튀니지아가 보일 듯하고 목소리가 좀 큰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면 들릴 듯 하지 싶다.

◇부분이 전체로

이런 광고가 있었다. 낭떠러지에 자동차가 간들간들 걸려 있다. 바짝 긴장을 한 남자가 낭떠러지 끝 자동차에 매달려 있다. 깃털 정도의 작은 무게만 더해져도 자동차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고 그 반대라면 운전자는 구출될 수 있는 상황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 새 한 마리가 홀연히 날아와 앉으니 무게 중심에 변화를 주었다. 운전자의 희망과는 반대로 말이다.

역사 속에서 트라파니와 마르살라는 이 광고의 한 마리 새와 같았다. 이 새를 내 편으로 만드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트라파니와 마르살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불과 30분이면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도시다.

이 두 도시를 움켜잡기 위해 로마와 카르타고는 공방에 공방을, 물고 물리는 싸움을 벌였다. 이때가 제1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249년, 로마의 함대를 이끈 사람은 집정관인 클라디우스 풀케르였다. 이때 마르살라와 트라파니는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로마 함대가 트라파니에 진입하자 카르타고는 해전의 정석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함정을 만에서 모두 빼 내어 북쪽으로 빠져 있다가 로마 함대를 유인하여 만으로 몰아넣었다. 아마도 트라파니 앞 바다에 있는 에가디 제도가 카르타고 함정들을 은폐시키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현장에 와서 당시 전황을 복기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해전에 강했던 카르타고의 탁월한 전술이었다. 물론 이 해전에서 카르타고가 승리를 거뒀다.

8년 후 로마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결국 로마는 이 해전에서 복수를 가함으로 1차 포에니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전쟁의 신인 야누스 신전의 문도 432년 만에 닫히게 되었다. 이 작은 두 도시가 무게의 중심을 기울게 만든 작은 새가 된 것이다. 부분이 전체가 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이 경우다. 작은 두 개의 도시를 정복함으로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에서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 에리체에서 본 트라파니. 시칠리아 서부의 대평원이 발 아래에 있다./조문환 시민기자

◇작은 기적

마르살라 쪽에서 트라파니를 보면 염전 위에 떠 있는 도시처럼 보인다. 바다의 수위는 우리나라 남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높다. 발아래 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눈높이 정도에 바닷물이 올라 와 있다. 현재의 마르살라와 트라파니는 시칠리아의 모퉁이의 작은 어촌에 불과하다. 허물어져 버린 에리체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부분이 전체가 되었던 것은 단지 과거에 불과하다. 더 이상 부분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역전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개인도 국가도 그런 것 같다.

아침에 트라파니 항구 어시장은 내가 이 두 도시에서 본 어느 경치나 광경보다 더 멋져 보였다. 시칠리아 홍보 책자에 나오는 에리체 보다 더 짜릿했고 역사책에서 읽었던 포에니 전쟁보다 더 흥미로웠다. 장군들도, 수만 명의 군사들도, 5단층 갤리선도 없었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싱싱하고 싸요 싸!" "떠림이요 떠림이!" "금방 바다에서 낚싯바늘 빼 온 놈이라니깨!" 그렇게 들렸다. 우리의 어시장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흥정에 흥정이 붙었다.

트라파니와 마르살라를 잇는 백리의 소금길과 염전과 그리고 에리체에서 내려다 본 시칠리아 서부의 대평원, 이들은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탈리아의 장바구니 물가를 좌우하고 있다. 시칠리아의 운명을 가르는 전략적 요충지나 낭떠러지에 걸려 있는 자동차 위의 한 마리 새는 아닐지라도 트라파니와 마르살라 사람들의 땀이 소금이 되고 거름이 되어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곳이다. 성당의 주인인 성인들보다 더 큰 기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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