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시설물 없는 청정지역 거창 서덕들
갈수록 귀해지기에 아끼고 또 가보고픈

지난주 거창군에서 보내온 취재계획 한 건이 눈에 띄었다. '서덕들'에 대형 농사용 창고가 들어서려고 해 동네 주민들이 반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역 민원성 기사라고 여겼다. 그런데 서덕들이 어떤 곳이기에 창고 하나 짓는데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지? 논 한가운데 송전탑을 세우는 현실이 아니던가.

거창 파견기자로부터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했다. 서덕들은 위천면 상천리 일대 105㏊쯤 되는 넓은 들녘이다. 이곳에는 농사용 수로 외 전봇대와 비닐하우스 등 인공시설물이 없다. 친환경농법으로 농사짓는 거창군의 대표 청정지역이라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소녀(할머니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귀향>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2016년 2월 개봉한 영화를 다시 검색해봤다. 거창 한디기골(가상 지명) 어느 지게꾼의 외동딸 정민은 장난치기 좋아하고 웃음 많은 열네 살 아이였다. 어느 날, 정민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순사들에 의해 어디론가 강제로 끌려간다. 생김새도 나이도 고향도 저마다 달랐던 또래 여자아이들과 도착한 곳은 머나먼 중국땅. 그들을 맞은 건 총칼을 찬 일본군들이었다.

정민이가 아버지 지게에 올라타서 노래를 부르며 걷던 그 들녘. 그러나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었던 그 들녘. 영화에서 서덕들은 1943년에도 그랬을 법한 옛 시골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취재 다음 날, 담당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창고를 지으려던 영농조합이 주민 설득이 어려워 사업을 취소한다고 알려왔다는 것이다.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에 상황을 무마하려는 발 빠른 대응이었다. 서덕들 경관 보전에 힘을 실었던 거창군의 입김이 작용한 걸까? 임시방편 입막음이 아니길 바란다.

주민들은 언제든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대안을 경관 농업에서 찾았다. 농업과 자연이 어우러진 경관을 잘 보전해 관광객 유치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내는 농업형태다. 전북 고창 청보리밭, 강원 봉평 메밀밭, 제주 유채단지 등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자치단체마다 관광객을 끌어 모으려고 인위적으로 대단지에 코스모스나 메밀·유채꽃밭을 조성한다. 이를 배경 삼아 축제를 여는 곳이 경남에도 많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예산이 투입되나? '한철 장사'에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라며, 평소에는 문이 잠긴 간이화장실을 곳곳에 설치하고, 시시때때로 덱로드를 교체하고, 경관과 어울리지 않은 루미나리에를 장식하고 있다.

서덕들에는 '아무것도 없다'. 금원산과 현승산 등 주변환경과 어울리는 탁 트인 논이 있을 뿐이다. 서덕들이 생태환경 보전 가치가 더 큰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다. 이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지키려는 주민들이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전봇대를 설치하지 않고, 대형 창고 건립도 막아냈다. 이러한 '천연 세트장'이 갈수록 귀해진다. 귀해서 아끼고 싶고, 한 번쯤 가보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