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간섭·탄압 없던 클럽서 케이팝 성장
지역문화 부흥·미래 설계의 본보기 삼자

격세지감이라 해야 할까. 처음 한류란 말이 등장했을 때 순간 타오르다 이내 사그라들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기는 이가 많았다. 유행해봤자 상대적으로 대중문화의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중국과 동남아 정도겠지 싶었다. 그런데 일본 시장에 들어가나 싶더니 200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과 남미는 물론 대중문화의 본산인 미국까지 진출하는 사례가 등장했지만, 주류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케이팝은 세계 주류 문화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싸이가 한 번 히트치더니 곧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방탄소년단은 확고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비틀스의 나라 영국의 BBC가 방탄소년단을 소개하는 기사 소제목에 '21세기의 비틀스'라고 표현할 정도가 됐다. 기나긴 군사독재 시절 온갖 검열과 억압에 시달렸던 과거를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운 결과다. 한국 대중음악이 어떻게 이런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그 출발점은 어디였을까?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두발 및 교복 자유화, 통금 해제, 프로스포츠 육성 같은 유연한 문화정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당시 정부 정책이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985년 이태원의 외국인(정확하게는 주한 미군) 전용 클럽이던 '문나이트'에 내국인 출입이 허용됐다. 그곳은 단순 유흥이 전부였던 여느 나이트클럽과는 달랐다. 최고의 춤꾼들이 자웅을 겨루는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창 전성기 때는 80평 남짓한 클럽에 500명이 넘는 손님들이 모여 왁자하게 음악을 즐겼다. 특히 새벽 서너 시가 되면 30평 정도의 플로어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그 춤판은 일종의 경연장이었다. 미국의 댄스영상을 보고 최신 댄스를 습득한 춤꾼들이 기량을 뽐냈다. 브레이크댄스와 힙합이 여기서 시작됐다. 지역 춤꾼들도 이곳에서 합을 겨루려고 서울로 가 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최초의 정점에 박남정이 있었고 곧이어 흑인음악의 선두주자 현진영이 등장했다.

문나이트를 종종 찾던 이수만은 현진영과 처음 계약하면서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연예기획사의 시작이었다. 구준엽과 강원래는 현진영의 백댄서를 하다가 클론으로 데뷔했다. 케이팝 한류의 시작이었다. 양현석은 박남정 백댄서를, 이주노는 인순이 백댄서를 거쳐 서태지와 결합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를 열었다. 문나이트에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졌고 영웅들이 탄생했다. 문나이트 모델은 이내 강남으로 건너가 규모를 키웠고, 1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는 마침내 대형기획사 전성시대가 열렸다.

케이팝은 현재 정부의 문화정책의 중요한 분야로 꼽힌다. 그러나 오늘날의 케이팝이 정부 지원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전혀 아니다. 정부가 기여한 게 있다면 초창기 문나이트를 탄압하지 않고, 문나이트 출신들이 방송을 휘저어도 내버려둔 것이다(물론 현진영은 탈이 많았지만). 엄밀히 말해 정부의 케이팝 정책은 숟가락을 얹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 정도가 또 맞고.

지역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제는 지역 문화를 살리자는 목소리가 높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요구다. 하지만 그 일에 지자체가 앞장서는 게 맞을까? 지자체가 완장 차고 앞장서는 문화라는 게 과연 얼마나 매력적일까?

새로운 문화를 기대한다면, 매력적인 문화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1980년대의 문나이트를 배워야 한다. 지역의 꾼들이 모이는 곳,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하는 곳, 그런 곳이 우리 지역 어디에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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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없다면? 왜 없는지 성찰해야 한다. 법과 제도 때문인지, 억압적인 지역 사회 분위기 탓인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초중등학교 세계를 휘젓던 스타들이 졸업과 함께 지역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바로 거기서 지역 문화의 비전을 찾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제발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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