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도 페미니즘 뿌리가 있다오
여성 경제·사회활동 중요성 강조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유영준 등 민족·여성해방 함께 외친 7명 조명

한국 페미니즘 출발은 어디, 언제일까?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조선의 페미니스트>는 한국의 여성해방과 함께 페미니즘이 탄생하는데 충분하고 나름 있는 문맥과 사상을 조선의 여성에서 찾았다.

동아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이 걸었던 길이 미국·유럽의 페미니스트가 걸은 길과 어떻게 다른지, 식민지 경험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민족해방운동에서 이들은 어떻게 개입하려고 했는지 짚었다.

이 출발은 '조선부녀총동맹'에서 활동했던 여성이다. 1945년 12월 22일 서울 안국동 풍문여고, 조선부녀총동맹 결성식이 열렸다. 이들은 "어머니는! 아내는! 딸 된 사람은! 부엌에서! 농촌에서! 거리에서! 우리가 받아온 모든 부면에서의 차별은 세계 어느 나라를 찾아보아도 유례없는 비분(悲憤)한 것이었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한국 여성해방운동의 주역은 젖먹이를 품에 안은 젊은 어머니, 중년의 부인, 단발머리 여학생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유영준(1890~?)이 있었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유영준은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애국계몽과 부국강병 사상에 동조했다. 또 안창호의 도움과 영향으로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성도 국민으로 인정받고, 이것이 국권 회복의 기초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날이 갈수록 구체화했고 여성들이 여성 단체를 조직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영준이 방학을 이용해 전국에서 강연을 벌이면 가는 곳마다 구름관중이었다고 전해진다.

▲ 1920년대 신문에 '각성한 부인'이라고 소개된 유영준. /〈조선의 페미니스트〉 발췌
유영준의 활약은 언론 기고로 엿볼 수 있다. 1920년대 초반 신여성은 근대의 아이콘이었지만 후반에 들어서 비난의 대상이었다. 이는 혐오로 이어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나의 혼인관'이라는 제목으로 연재 기사를 실었는데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다. 현대 여성들이 신사조를 맛보면서도 금전의 노예성이 갈수록 풍부해진다고 썼다.

유영준은 이에 대한 반박 글을 투고했다. 만약 여성이 경제성을 보고 남성을 선택했다면 이는 현실을 똑바로 관철한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이 전문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고 남성과 경쟁할 수도, 직업을 구할 수도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유영준은 "남녀평등은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관념의 변화를 필요로 하며, 여성도 사회 활동을 하는 인간이었다 한다"라고 여성해방을 말했다.

페미니즘을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 우월주의나 남성이 역차별을 겪는 여성운동으로 말하는 이도 적지 않은 이때, 유영준은 여성의 해방과 자유는 평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불평등하고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앞서 말한 것이다. 또 여성 혐오나 여성을 규정하는 언론의 태도와 보도 방식을 줄곧 문제 삼으며 여성 운동의 방향은 법률 제정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기시감이 든다.

2000년대 순식간에 확산한 단어 '된장녀'는 한국 여성의 허영심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미디어는 단어마다 '녀'를 붙여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고 이는 또 다른 여성 혐오를 낳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영준의 주장은 아직도 진행 중인 우리의 말이다.

또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라고 외친 정종명(1986~?), 여성의 사회 활동을 강조한 정칠성(1897~?), 스스로 해방의 힘을 키우자던 고명자(1904~?), 여성 노동자의 용기를 보여준 허균(1904~?), 민주주의 실현 방식을 제안한 박진홍(1914~?), 공장과 농촌의 여성이 자랑스럽다는 이순금(1912~?)까지.

이들은 저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과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분노로 페미니즘을 말했다. 이렇듯 페미니즘은 고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도 하나가 아니다. 저마다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것이 필요하다.

철수와영희 펴냄, 344쪽, 1만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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