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일본인 지주 무라이, 창원·김해서 땅 마구 사들여
이주민 동원해 취수시설 설치, 농민·노동자 투쟁 잇따라

주천갑문 안쪽은 암석을 발파하고 떼어낸 흔적이 우툴두툴 남아 있다. 대신 바깥쪽은 앞과 뒤 길고 네모지게 다듬은 석재로 보기 좋게 마감했다.

낙동강쪽 정면은 먼저 큰 석재를 가장자리 양쪽에 쌓았다. 물이 흐르는 위쪽은 무지개 모양으로 마감하고 그 위에 작은 석재를 4~8겹 쌓았는데 가운데는 살짝 튀어나와 있다. 너비는 9m가량, 물위 높이는 5m 남짓이며 길이는 30m 정도로 가늠된다.

정면 한가운데는 가로로 넉 자씩 두 줄로 '村井農場(촌정농장)' '注川閘門(주천갑문)'을, 왼쪽에는 세로로 '明治四十五年五月竣工(명치45년 5월 준공)'을 한 줄 새겼다. 명치 45년은 경술강제병합 이태 뒤인 1912년이다.

▲ ▲ 1931년 11월 12일 자 <매일신보> 7면 1단에 실린 사진. "박간농장에 들이닥친 소작인들"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박간농장은 촌정농장의 바뀐 이름이다.

◇촌정제방은 도로로 이용되고 = 주천갑문은 촌정제방과 짝을 이룬다. 바로 옆 서북쪽 용등마을을 거쳐 대산면사무소가 있는 가술마을을 지난 다음 산남저수지 북쪽 산남마을까지 구릉을 끼고 10km가량 꾸불꾸불 이어지는데 도로로 쓰이고 있다.

지금은 주천갑문과 닿는 부분이 끊어져 있지만 원래는 이어져 있었다. 현재 있는 주남저수지 제방에서 보면 동쪽은 2~5km, 북쪽은 700m 정도 낙동강 쪽으로 더 나가 있다. 주남저수지의 최초 형태라 할 수 있다.

주천갑문과 촌정제방을 만든 목적은 가장 큰 문제였던 양쪽에서 닥쳐오는 범람을 막는 데 있었다. 낙동강의 범람은 강변에 형성된 자연제방이 막아줬으나 배후습지(지금 주남저수지 방향)의 범람은 막아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 1929년 9월 22일 자 <중외일보> 2면 보도. 주제는 "지주는 중재도 듣지 않고 소작인은 결사투쟁"으로, 부제는 "일본 농민조합에 가담 박간농장 분규 악화"라고 달려 있다.

◇촌정농장의 엄청난 규모 = 갑문에 새겨져 있는 촌정농장은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1864~1926년)의 성에서 따왔다. 무라이는 1904년 사무소를 설치하고 1905년부터 창원시 동읍·대산면과 김해시 진영읍에 집중(지금 대산평야)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지를 취득했다.

규모는 엄청났다. 최원규 부산대 사학과 교수는 논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사례'에서 무라이 소유 토지는 1907년 이미 710만 평이고 1910년과 1914년에는 1407만6000평과 1840만9800평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무라이가 장만한 토지는 대부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이영학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한말 일제하 창원 식민지주의 형성과 그 특질-촌정 진영농장을 중심으로'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조선인 김성윤을 앞세워 1905년 취득한 6만2870마지기 가운데 지목·면적이 불분명한 부분을 뺀 5만3270마지기를 살폈더니 묵정밭(陳田)·갈대밭(蘆田)·땔나무밭(柴田)·풀밭(草田)이 대부분(5만75마지기)이고 나머지 3195마지기 또한 논이 아닌 (겉)보리밭(皮牟田)이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황무지라 해야 할 이런 땅을 취득한 이유는 높은 투자 효율에 있었다. 경작지가 아닌 만큼 비용이 싼 반면 근대 토목 기술과 조선 노동력을 동원하여 논으로 개간하고 기반시설을 갖추면 이문이 더 많이 남는다는 계산이었다.

▲ ▲ 1933년 7월 6일 자 부산일보 5면에 홍수 사진이 2장 실려 있다. 일본어로 되어 있는 설명글을 우리말로 옮기면 "(위)진영역에서 바라본 침수된 박간농장. (아래)진해요항부에서 온 구조보트를 끌어내는 실제 모습(진영역에서)"이 된다.

◇갑문 내려고 바위까지 뚫고 = 그러나 치수와 개간은 만만하지 않았다. 이영학 교수의 논문을 보면 1908년 양수펌프로 기계관개(灌漑)를 시작했으나 7월에 범람으로 갑문이 1차 파괴되었고 1911년에도 다시 큰물이 들어 제방과 갑문이 모두 2차 파괴되었다.

1912년 1월 13일 자 <매일신보> 2면에 실린 기사 '촌정농장 재흥(再興)'에는 이런 어려움을 겪고 나서 새로 갑문을 설치한 사정이 담겨 있다.

"해마다 수해가 들어 경영이 매우 어려웠다. 촌정이 조선에 전문기사를 데려와서 현장을 검토·분석한 결과 여태까지처럼 하는 대신 수해 예방을 위해 가까운 산을 뚫어 터널을 내고 갑문을 설치하였다."

주천갑문과 촌정제방으로 상징되는 대산평야와 주남저수지 조성의 역사는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지금 보는 주남저수지 제방은 대산수리조합(1921년 설립 당시 조합장 이규직)이 1922~24년 쌓았다.

인공수로도 내었는데 주남저수지에서 북쪽으로 7㎞가량 떨어져 있는 본포 낙동강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1928년 완공되었다. 낙동강 본류 쪽에도 1928년부터 제방을 쌓았는데 홍수로 무너지고 다시 쌓고를 거듭하면서 36년까지 9년이 걸렸다.

◇피어린 소작농들의 투쟁 = 일본 지주의 착취·수탈에 맞선 조선인 소작농들의 쟁의도 잇달았다. 신문 보도와 경찰 기록을 보면 최초 소요가 1914년 4~5월에 일었고 1925년에는 민족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소작 쟁의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토목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졌다.

1929년 5~11월 소작료 재조정을 위하여 투쟁을 벌여 양보를 받았으나 지주가 약속을 뒤집는 바람에 다시 쟁의에 나섰으며 1931년 10월~1932년 2월에는 벼베기까지 거부하며 싸운 끝에 승리했다.

1934년에도 7월과 11~12월에 쟁의를 벌였고 1935년은 7월부터 소작료 인상 반대 투쟁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12월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1936년과 38년에도 여기 소작농들의 쟁의 관련 기사는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주천갑문을 시작점으로 삼아 해방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에 어려 있는 역사를 살펴보면 앞선 세대 선조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생활 터전이면서 근대농업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남저수지는 해방 이후 한 번 더 축조되었다. 1969년 9월 대홍수로 제방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는 엄청난 수해가 들자 1970년 10월 30일~1976년 11월 30일 제방을 높이는 등 창원농지개량조합(조합장 김익진)이 창원지구(산남·주남·가월저수지) 개발사업을 벌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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