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소녀회' 밀양 삼랑진 출신 김금연 참여
김응수·이명시·김복선·김봉애, 부산 일신여학교 만세시위 거사 주도

◇광주 = 1930년 10월 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녀 11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는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비밀결사 조직인 소녀회(少女會) 회원들이다. 여기에는 밀양 삼랑진 출신 김금연(1911~2000)이 포함돼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도 주도한 이들로 소녀회는 민족독립, 자유 쟁취, 여성해방 등이 목표인 단체였다. 1928년 11월 초순 결성된 소녀회는 매달 한 차례 모여 사회과학 서적 등을 연구했다. 회원들은 학생소비조합을 꾸려 30원을 출자하는 등 여러 운동을 펼쳤다. 회원은 장매성, 박옥련, 고순례, 장경례, 암성금자, 남협협, 박계남, 박채희, 박현숙, 김금연, 김귀선 등이다.

▲ <동아일보> 1930년 9월 30일 자 지면. 밀양 출신 김금연이 속한 소녀회를 두고 광주법원에서 초유의 치안유지법 공판이 열렸다는 내용이다. 법정 안팎 경계가 자못 엄중하고, 방청객이 몰리는 등 당시 분위기와 재판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다. 소녀회 회원 얼굴사진도 실렸는데, 맨 왼쪽 위가 김금연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당시 소녀회 공판에는 눈과 귀가 쏠려 있었다. 1930년 9월 30일 자 <동아일보>에는 소녀회 공판 기사가 실렸는데 '광주법원 초유의 치안유지법 공판으로 법정 안팎 경계가 엄중하며, 이른 새벽부터 방청객이 몰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울러 공개 5분 만에 방청이 금지되고, 당시 검사는 최고 2년을 구형한 것으로 나온다. 소녀회 11명 얼굴도 실렸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는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점차 번져가는 시기였다. 좌우합작 항일단체인 신간회 등 영향을 받아 광주 학생들 사이에서는 독서회와 성진회가 결성됐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모욕적 발언으로 희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11월 3일 대규모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펼쳐진다.

이 같은 항일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졌고, 학생들은 동맹 휴학과 식민교육 반대로 연대했다.

학생 5만 4000여 명이 참가해 구속 1462명, 퇴학·무기정학 2912명 조치가 뒤따랐다는 분석도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0년대 학생운동과 더불어 민족운동을 '총결산'했다", "원산노동운동·용천소작농민운동과 1929년 3대 민족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중심에 있던 김금연의 공훈을 기려 1995년 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 부산 일신여학교 현재 건물 모습.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다. 2006~2007년 예산이 투입돼 원형 복원 공사가 진행됐으며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부산 = 
부산지역 3·1운동 주요 사례로 꼽히는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에는 경남 출신이 다수였다. 서훈된 인물만 4명이다. 통영 출신 김응수(金應守·1901~1979), 합천 출신 이명시(李明施·1902~1974), 김해 출신 김복선(金福善·1901~?), 마산 출신 김봉애(金奉愛·1901~?).

김응수는 1995년, 이명시는 2010년, 김복선과 김봉애에게는 2015년 각각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만세운동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된 이들은 뺨을 맞거나 구둣발로 차이는 등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굳은 절개를 보였다. 이 같은 발언도 전해진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운동하는데 무엇이 나쁘냐?"

부산에는 3월 2~3일께 독립선언서가 전달됐고,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거사를 준비했다. 연락 담당, 태극기 제작 등을 맡았다.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들은 기숙사에 모여 벽장 안에 숨어가면서까지 밤을 새워 태극기 100여 개를 만들었다.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밤 9시 경남 출신 4명을 포함한 11명 학생이 교사인 주경애, 박시연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좌천동 거리까지 행진했다. 여기에 군중이 가세하면서 수백 명이 2시간가량 만세시위를 벌였다.

체포된 학생들은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일신여학교는 1895년 10월 호주장로교 선교회가 부산 좌천동에서 연 학교로 현 동래여고 전신이다. 현재 건물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다. 2006~2007년 예산이 투입돼 원형 복원 공사가 진행됐으며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참고문헌

<진해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2004), 황정덕, 금창출판사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1996), 박용옥, 지식산업사

논문 <해방직후 경남지역 여성운동조직과 여성운동>(2008), 임정연, 동아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집>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양상과 이념'(2009), 김성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5집>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의 변화'(2010), 윤선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gsim.gen.go.kr)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2주년 기념 심포지엄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중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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