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무상함과 빠름을 비유하는 말 가운데 인생의 시간은 한 개의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다는 말이 있지요. 처음에는 천천히 돌아가다 갈수록 도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러다 마지막 휴지가 풀어지고 나면 딱딱한 종이 한 개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마치 허물 벗은 벌레의 흔적 같고, 추수 끝난 들판에 버려진 허수아비를 보는 것 같아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휴지가 돌아가는 모습은 사람이 나이 들며 느끼는 세월의 빠름과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싶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다릴 때는 그렇게도 안 가던 시간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달아나듯 훌쩍 가버리지 않던가요. 똑같은 시간을 두고도 마음 쓰는 데 따라 이처럼 느리게도 가고 빨리 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이 무슨 도깨비 같습니다.

세월이 빨라도 너무 빠릅니다. 작년 그믐날 가까운 사람과 덕담을 나눈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어 얼마 안 있으면 강남 갔던 제비가 찾아올 날이 바로 코앞입니다. 생이 이울어갈 즈음인 지금은 두루마리 화장지 돌아가는 소리가 제법 빠른 소리를 내는 것이 남은 게 그리 많지 않음을 알리는 것 같아 괜히 마음만 서글퍼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남은 화장지를 생각하면 사는 게 몹시 허망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온몸을 휩싸고 돕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남은 것을 한 조각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살뜰하게만 쓴다면 혼자서 외로워하거나, 허망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외로움이 삶의 한 토막을 값있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며 보람되게 누려야겠지요. 우리가 세상의 시간을 아껴 쓰는 일은 잘 사는 일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이홍식.jpg
인문학자 고 김열규 선생의 글 하나를 옮깁니다. "나는 한 번도 시간의 얼굴을 본적이 없다. 다만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까마득한 길 끝에서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뒤 꼴을 먼빛으로 보았을 뿐이다." 나 역시 시간의 뒷모습은 물론이고 시간이 가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은 가만히 있는데, 흐른 건 내 마음이었으니까요.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