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서 고래고래 통화하는 노인
예의 잃어가는 모습이 그저 부끄럽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며칠 전 꽃피고 새우는 봄날이었다. 그런데 서울에만 가면 나는 아직도 '촌놈'이다. 혹시나 해서 코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호주머니 속 지갑이 잘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서울 이야기,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란 말이 생각나서다. 서울은 여전히 복잡하다. 사람 많고, 건물 높고 휘황찬란한 거리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붐빈다. 지하철 탄 대부분 사람은 고개 숙인 채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목적지인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크게 들린다. 얼핏 보니 광화문 방향이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심한 욕설이 귓전을 때린다. 말로만 듣던 '태극기 부대' 일부를 만난 것이다. '빨갱이, 종북, 주사파, 태블릿 피시 조작, 탄핵 무효, 5·18, 폭동, 간첩, 박근혜 전 대통령' 같은 말들이 욕설과 뒤섞여 계속 들려온다. 배설하듯 반복하는 온갖 말들 속엔 증오가 가득 묻어 있다. 듣고만 있는데도 무섭다. 모처럼 올라온 서울이지만 어서 빨리 촌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서둘러 서울 일정 모두 마치고 마산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피곤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르르 잠이 쏟아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 버스 안에도 '태극기 부대' 소속 할아버지가 타고 계신 모양이다. 버스를 탄 모든 승객은 무조건 자기 말 들으라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전화를 하신다. "내 나이가 70이 넘었어. 내가 한 번 성내면 산천초목이 다 운다니까." 전화 대화 사이사이에 간간이 욕설도 튀어나온다. 주변 사람들 불편함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씀하신다. 드디어 버스가 출발하기 위해 문을 닫는 순간. 갑자기 젊은 여성이 급하게 운전석 옆문을 두드린다. 버스가 멈췄다. 가까스로 버스에 오른 젊은 여성은 연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순간에도 할아버지의 전화 통화는 끝없이 이어진다. 할아버지의 대화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나이는 계급장이다. 어린 녀석들은 말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나이는 벼슬이다.' 이런 이야기를 무려 30분 넘게 반복하고 있다. 전화 통화를 좀 멈춰달라고 얘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이번에는 할아버지 뒤쪽에서 '따르릉따르릉' 또 다른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한참을 울려대던 벨 소리가 멈춘 뒤에는 스피커 통화 모드가 이어진다. 두 사람이 대화하면서 버스 안에서 스피커 통화 기능을 사용한 것이다.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계속 들려온다. "살기가 많이 힘들다. 경제가 너무 어렵다. 자식들은 말을 안 듣는다." 이번에도 욕설이 섞여 있다. 본의 아니게 대화 내용을 엿듣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빨갱이'들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정권을 비판하면서 나온 말인 듯하다. '좌파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걱정을 늘어놓는다. 온갖 '가짜 뉴스' 이야기도 이어진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급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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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어른이 되어 가면 갈수록 예의를 더 잘 지켜야 하는데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닥치라며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데 그냥 조용히 삭인다. 다만 조금 늦게 버스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몹시 부끄러워했던 그분께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들었다. 미안해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철이 덜 들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갑자기 모 당의 전당대회장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던 그 말이 생각난다. "저딴 게 무슨 대통령입니까?" 말을 바꿔서 살짝 되뇌어 본다. '저딴 게 무슨 어른입니까?' 이런 말도 떠올랐다. '그들은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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