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 작 오라토리오 '메시아' 장례식 장면에 흐르는 이중창
알비노니 대표작 '아다지오' 비극적인 순간 어우러진 선율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우선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주는 시각적 쾌감이 좋다. 영화 <투모로우>를 통해 뉴욕을 삼켜버리는 거대 쓰나미를 경험했고 영화 <2012>에선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고층빌딩들을 바라봤으며 거대 화산폭발의 화염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었다. 또한 거대상어와 사투를 벌이기도 하였고(영화 <죠스>) 인류를 말살시키려는 외계인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떠나기도 하는(영화 <우주전쟁>) 현실에서는 만나기 힘든 경험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좋아하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결코 나의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는 것. 감당하기 힘든 재난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안도감이 이러한 영화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기 때문이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거대한 재난 영화다. 개인의 인생사에 있어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재난, 차라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식인상어를 만나거나 사방이 용암으로 둘러싸인 곳에 고립되는 편이 나으리라 여겨지게 만드는 지옥 같은 재난이다. 우리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흔히들 하며 만약이기에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만약 신체의 한 부위를 잃는다면, 만약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등등.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이 겪은 일은 만약이라는 전제하에서라도 생각조차 싫다.

보스턴에서 주택 관리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리'는 어두워 보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우울하려니와 원활한 인간관계 형성의 의지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 '리'는 그의 형 '조'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이전 그가 살던 맨체스터를 방문하면서 이제 영화는 그의 현재와 과거의 모습을 오가며 그의 아픔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가족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저 형 '조'와 그의 아들인 조카 '패트릭'과 함께 바다 낚시를 하는 것이 행복한 '리'. 이제 형의 주검을 마주한 그는 장례식을 준비하고 조카의 반대에도 불구 땅이 언 이유로 시체를 냉동보관 후 봄에야 묻기로 결정하지만 한가지 당혹스러운 것은 형이 유언장에 자신을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훌쩍 커버린 조카와의 의견충돌, 맨체스터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리'와 그곳을 떠나기 싫은 조카, 이미 낡아 모터를 교체해야 하는 요트를 팔 것인지 말 것인지 그들은 줄곧 언쟁이다. 그리고 왠지 그를 아는 맨체스터의 지인들 또한 대하는 태도가 살갑지만은 않으며 주인공 또한 누군가가 베푸는 호의와 여성들의 접근에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다.

▲ 주인공 리. 그는 형 조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이전에 살던 맨체스터를 방문해 조카 패트릭을 만나게 된다. /스틸컷

◇죄책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밤 늦도록 끝날 줄 모르던 '리'와 친구들의 모임, 흥겨움은 아내 '랜디'의 핀잔으로 막을 내리고 친구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 '리'는 난로에 땔감을 넣고는 안전망도 잊은 채 술을 사러 마트로 향한다. 평소보다 먼 거리를 돌아 집으로 도착한 '리'가 정신이 나간 듯 바라봐야 하는 것은 화염에 휩싸인 자신의 집과 아이들이 아직 집안에 있다며 울부짖는 아내 '랜디'. 그렇듯 자신의 실수로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은 주인공은 죄책감인 듯 오열도 없이 그저 멍하다.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며 위로하는 경찰관의 총을 빼앗아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보지만 이마저도 실패한 그는 그렇게 아픈 기억을 지닌 맨체스터를 떠나 반지하 단칸방을 감옥인 양 아무런 희망도 없이 스스로를 벌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제 형 '조'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친모를 찾아가려던 조카 '패트릭'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형 '조'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조카의 후견인이 되고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전 아내는 못되게 굴어 미안하다며 울음으로 사죄하지만 그마저도 주인공에게는 어색하고 아직도 자신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

결코 요트를 팔 수 없다는 조카의 의견에 따라 결국 새 모터를 장착한 조카와 주인공 '리'는 그 옛날 특별할 것 없지만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던 그때처럼 다시금 그토록 그리던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낚싯대를 드리운 둘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을씨년스러운 잿빛 바닷가 조그마한 도시를 배경으로 그렇게 잔잔히 막을 내린다.

◇아다지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모든 장면이 천천히 흘러감에도 감독은 주인공과 관객에게 가장 슬프면서도 기억하기 싫은 순간을 더욱 느리게 처리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그리고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아이들의 시체가 수습되는 긴 장면 동안 줄곧 흐르는 비장한 곡이 있으니 화면이 느리게 흘러가듯 곡의 제목도 '아다지오(아주 느리게)'다. 비발디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작곡가 '알비노니'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이 틀림없는 비장한 선율을 지닌 명곡으로 오늘날 알비노니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일생 동안 작곡한 50편이 넘는 오페라가 거의 유실된 점은 안타깝다 하겠다. 영화에 사용된 '아다지오'는 장중한 저음의 오르간 소리를 바탕으로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이 지극히 애잔한 느낌을 주는 곡으로 영화의 장면과 어우러지니 주저앉을 듯 슬프게 다가온다. 비극적 순간을 영상적으로 늘림으로써 그 순간에 대한 주인공의 시각적 각인을 보여주었다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그의 헤어나오지 못할 어둠으로의 심리적 추락을 귀로 들려 준 것이니 참으로 모진 감독이다.

이렇듯 심장을 내려 앉히는 곡과 함께 영화에 사용된 또 하나의 명곡이 있으니 이번엔 안식과 위로다. 형 '조'의 장례식 장면에서 천사의 목소리인 듯 은은히 울려 퍼지는 곡, 바로 작곡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중 콘트라알토와 소프라노의 2중창인 'He shall feed his flock(그는 그의 무리를 먹이시고)'. <메시아>는 헨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종교 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명곡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할렐루야' 합창은 너무나 유명하며 이 곡에 감명을 받은 영국의 국왕 조지 2세가 갑자기 일어남으로써 이 곡이 연주될 때는 일어나 경청해야 하는 전통이 생긴 일화 또한 만들어낸다. 실제 연주회장에서 눈치를 보며 일어나 옆자리의 관객과 겸연쩍은 웃음을 나누어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음악 한 곡 듣는데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지만 인류가 만들어 낸 위대한 위업에 잠시 일어나 경의를 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제1부 '예언과 탄생', 제2부 '수난과 속죄', 제3부 '부활과 영생'을 내용으로 한 3파트 53곡으로 이루어진 2시간이 훌쩍 넘는 대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한 곡 한 곡 모두 주옥 같으며 모든 음악을 통틀어서도 정점에 서 있는 걸작이니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 매력에 빠져 보기를 권한다. 영화에서 'He shall feed his flock'이 흘러 나오는 순간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 선율은 죽은 자만이 아닌 살아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마저도 위안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늪에 빠진 이를 끌어올리는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오며 영화를 보는 내내 가득했던 관객으로서의 심리적 불안감마저 지워버리는, 음악적으로 절묘한 순간인 것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불편하게 흘러갔다.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고 필요한 것이 필요한 순간에 없다. 냉장고 문조차 한번에 닫히는 법이 없고 차를 세워 두었지만 어디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조카는 뒤늦게 배웅인사를 나오지만 이미 지쳐 떠나버린 후이며 낮은 톤으로 이야기하지만 언제 고성과 욕설이 튀어나올지 모를 것 같은 묘한 긴장감들이 영화 전체를 휘돈다. 모터가 고장 나 움직일 수 없는, 조류에 맡겨 멋대로 흘러가는 표류가 주인공의 삶인 것이다. 모터가 낡아 버린 배를 팔자는 주인공의 주장은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반면 결코 팔 수 없다며 새로운 모터를 위해 돈을 모으는 조카는 포기하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카의 진심 어린 조언이다.

▲ 리(왼쪽)와 조카 패트릭. 리는 이미 커버린 조카와 데면데면하다. /스틸컷

◇상처와 치유

이제 바람처럼 새로운 모터를 달고 둘은 바다로 나가고 희망처럼 보였으며 그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그가 겪은 슬픔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을 때 그에게 모터를 달아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 치유되지 못하는 아픔은 없다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한다지만 과연 그럴까? 요트에서 말없이 예전처럼 낚시를 하는 두 사람을 비추며 그렇게 영화가 끝나기에 그 이후 주인공의 삶은 우리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지만 어쭙잖게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은 그가 가진 상처의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조사관의 위로에 이렇게 끝이냐며 반문하며 스스로를 벌하려 했던 그를 기억한다면 말이다. 하니 아직도 헛갈린다. 감독은 어떠한 상처도 치료될 수 있으니 새로운 모터를 달고 바다로 나가라는 것인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힌트가 있다면 형'조'가 동생'리'에게 했던 '경험이 지도가 되고 이를 참고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조언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아무리 큰 참고가 되더라도 이러한 지도는 결코 만들고 싶지 않다. 영화를 본 후 러시아의 문인 '푸시킨'이 남긴 유명한 시가 왠지 오늘은 거짓말처럼 들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 설움의 날 참고 기다리면 / 기쁨의 날이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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