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서 가장 많은 희생자 나온 만세운동
재현 행사 확대해 역사적 가치 드높이자

3·1운동은 비단 기미년 그해만의 일은 아니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는 새로 태어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시작이자 민족의 번영과 자주권 수호를 위한 첫발이었다.

온갖 만행과 악행을 저지른 일제에 맞서 1919년 3월 1일부터 두 달이 넘는 기간에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한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당시 인구의 10%나 되는 200여만 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해 그중 7500여 명이 일제에 의해 살해당했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1919년 3월 9일, 경상도에서는 최초로 함안군 칠북 연개장터 의거를 기폭제로, 함안읍 의거에 이은 군북의거는 삼남(三南) 지방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3월 19일 함안읍 장날 의거에서 당시 민인호 함안군수가 대한민국 독립을 외치는 시위대에 의해 군중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게 됐고, 기다무라 마산경찰서장과 함안경찰서 순사부장이 큰 봉변을 당한 사건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고을 원님이 만세를 불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군북장날 의거에 약 5000명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이다.

당시 5000여 군중은 구속된 애국지사 석방과 대한민국 독립을 외치며 경찰 주재소를 포위했다. 왜경은 진해 경중포병대대 군인과 경찰을 지원받아 주동자를 총으로 정조준했다. 당시 순국한 애국지사는 여성 1명을 포함한 23명, 부상자 18명으로, 일본 군경이 쏜 총탄으로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의거로 기록됐다. 이는 경상·전라·충청지방 등 이른바 삼남지방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의거다.

애국의 혼은 군북 사람들의 핏줄 속에 도도히 흘렀다. 이후 1932년 2월 28일 정오에 군북공립보통학교 고학년 280명이 조선어 시간 환원과 조선역사 시간을 요구하고, 노예교육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인 사건은 항일의 횃불이 꺼지지 않고 민족혼을 한껏 불태운 역사적 가치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오는 3월 20일 (사)군북3·1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시가지 재현행사가 예정돼 있다. 기념사업회는 지난 2001년 발족해 창립과 함께 조촐한 기념행사를 이어오다 2006년 광복 87주년을 맞으면서 첫 재현행사를 했다.

당시 왜경의 만행을 그대로 묘사한 시가지 재현행사는 진해 경중포병대대의 군중을 향한 발포와 총칼에 맞선 군중의 처절한 독립만세를 위한 함성이 군북면 시가지를 메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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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외침은 지역 면 단위 행사에서 그칠 게 아니라, 삼남지방에서 최대 피해지역이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군 단위를 넘어 도 단위 행사로 승격해 후손들의 애국정신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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