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흩어진 기록 현황파악
독립 도모·지원금 요청 등 담겨

창원 출신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국내에 잠입할 당시 들고온 문건이 9건인 것으로 파악됐다.

1887년 7월 9일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부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때 진주에서 체포돼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다. 1923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다시 체포돼 4년 복역하고, 1931년 11월 20일 임시정부 재무장 김구, 내무장 조완구로부터 경상남북도 상주대표 직위를 받고 귀국했다.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선생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면서 국내로 잠입할 당시 가지고 온 문건이 9건인 것을 확인했다. 문건은 해방 이후 몇 군데로 흩어져 보관돼 전체 현황이 확인되지 않았다.

문건은 △임명장(작성일 1931. 11. 20.) △달성 문장지 추조문(1931. 10. 3.) △달성 문장지 특발문(1931. 10. 3.) △밀양 백민 황상규 추조문(1931. 10. 3.) △창녕 성낙문 특발문(1931. 10. 3.) △진주 허만정 특발문(1931. 10. 3.) △임시정부서 김관제·윤상태에게 보낸 편지(1931. 11. 20.) △임시정부에서 김관제에게 보낸 편지(1931. 11. 20.) △상해격발문(1931. 10. 3.) 등이다.

유 교수는 "반침략전쟁을 준비한 임시정부가 이교재 선생을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고 중차대한 임무를 맡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 도쿄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등이 일어난 것과 연계해보면 선생에게 부여한 임무는 국내에서 반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들 문건은 그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임명장을 이교재 선생 후손 이상화 씨, 달성 문장지 추조문·특발문과 상해격발문(복사본)을 남평 문씨 세거지에서 확인했다. 동아대 박물관에서 밀양 백민 황상규 추조문, 창녕 성낙문 특발문, 임시정부서 김관제·윤상태에게 보낸 편지, 임시정부서 김관제에게 보낸 편지를 찾았다. 또 진주 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 존재를 1963년 동아일보 기사에서 알아냈다. 김관제에게 보낸 편지는 글자가 희미해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임명장에는 선생을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위임한다는 내용과 함께 '유지자 연락에 관한 일,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정부에 대한 특수헌성을 권항케 할 일' 등 임무가 담겼다.

달성의 문장지(문영박 선생 자)에게 보낸 추조문·특발문에는 사망한 문영박(1880~1930) 선생을 조문한 내용, 의연금을 보낸 임시정부에 감사와 독립투쟁을 지원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문 선생은 1919∼1930년 전국을 오가며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냈다.

황상규(1890~1931) 추조문에는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댄 선생에 대한 조문 내용이다. 성낙문 특발문에는 독립운동 지원에 감사와 독립투쟁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다. 성낙문 선생은 창녕을 상징하는 부호였다. 성 선생은 북한 김정남 어머니 성혜림의 조부로 잘 알려져 있다.

김관제·윤상태(1882~1942) 선생에게 보낸 편지는 일제 지배를 받는 상황이지만 세계가 변동하면서 폭발하기 직전이니 동지들과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글이다.

새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인 상해격발문에는 임시정부 사명과 특파원 임무를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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