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2058430.jpg

전 세계가 미중 무역분쟁으로 떠들썩하다. 분쟁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고, 중국이 이에 대응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미국이 이토록 중국을 견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17년 GDP를 보면 중국은 12조 2400억 달러로, 미국(19조 3900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을 바싹 따라붙는 추세다. 세계 최대 패권국가인 미국이 이런 중국을 달갑게 생각할 리 없다.

게다가 미국과 중국은 이미 경제적으로 깊숙이 얽혀 있는 사이라, 미국 내에서는 이런 중국을 방치할 경우 미국의 이익이 크게 침해될 것이라는 여론이 팽배하다. 미중 무역분쟁에 불을 댕긴 트럼프가 겨냥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 시절 종이호랑이로 불렸던 중국은 과연 미국에 필적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기세를 몰아 미국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그리하여 오랜 세월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생산력을 자랑하던 그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21세기 자본주의에 내재된 수많은 문제점과 중국이 처한 정치사회적 현실 때문에 결과를 속단할 순 없다. 그러나 현 추세대로라면 시진핑이 꿈꾸는 중국몽(中國夢)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실화할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금이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자본주의 시스템에 다들 익숙한지라, 중국이 세계 질서를 리드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하더라도 동아시아권에서는 이른바 ‘화이질서(華夷秩序)’가 굳건했다.

‘화이’란 중화와 오랑캐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화(華)는 곧 세계의 중심, 중국을 말하는 것이고 이(夷)는 중국을 둘러싼 나머지 오랑캐 나라를 통칭하는 말이다. 조선은 동이(東夷)였으며 서쪽에는 융(戎), 북쪽에는 적(狄), 남쪽에는 만(蠻)이 존재했다. 아니 그쪽에 사는 이들을 중국이 그렇게 불렀다는 말이다.

중국은 왜 1/n 국가로 존재하지 않고 세상의 중심인양 행동했을까? 원인은 간단하다. 국토가 광활하고 물산이 풍부해 다른 지역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갓 독립한 신생국인 미국에서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동부해안에서 산 6펜스짜리 수달 가죽을 중국 광주에 가져가면 100달러에 팔 수 있다.” 중국 귀족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싼 모피를 입는다는 말에 나돈 소문이었다.

미국이 독립한 이듬해 ‘중국황후호’는 이런 꿈을 안고 중국 광주로 향했다. 선장 사무엘 쇼가 남긴 글을 보자.

“우리는 중국에 도착한 첫 미국 선박이었지만 중국인들은 우리를 매우 환대했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와 영국인을 구별하지 못했다. 우리가 미국 지도를 가지고 인구와 영토를 설명하자 상인들은 우리가 매우 큰 나라에서 왔고, 중국 물건을 팔 수 있는 큰 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중국황후호는 4개월만에 가져간 물건을 다 팔고 1784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갈 때는 홍차와 녹차 몇백 톤, 도자기 40~50톤, 비단, 계피, 상아조각, 칠기, 남경 자화포(紫花布), 우산, 벽지 등 중국 특산품을 가득 실었다.

1785년 중국황후호가 무사히 뉴욕에 도착한 뒤 선장 사무엘 쇼의 항해일지가 보스턴에서 발표되자 온 미국이 발칵 뒤집히고, 화물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대통령에 취임한 워싱턴은 중국과의 통상을 우대하고 보호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 의회는 중국황후호 선원들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첫 항해 성공은 막 독립한 미국경제에 흥분제를 투여한 것과 같았다. 중미 통상은 미국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어, 남북전쟁 기간에도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해마다 30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불과 200여 년 전 모습이다.

광활한 국토, 풍부한 물산은 중국인들의 심성에 ‘천하(天下)’는 중국과 중국을 둘러싼 오랑캐로 구성된다는 사고방식을 새겨놓았다. 유아독존적인 중화사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창려선생으로 불리는 대문장가 한유는 “위에서 형상으로 이뤄진 것을 하늘이라 하고, 아래에서 형상으로 나타난 것을 땅이라 하며, 그 둘 사이에서 생명을 가지고 생겨난 것을 사람이라고 한다. 위에서 형상화된 해 달 별은 모두 하늘의 것이요, 아래에서 형상화된 풀 나무 산 냇물은 모두 땅의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생명을 갖고 있는 오랑캐와 새 짐승은 모두 사람의 것(人者 夷狄禽獸之主也)”이라고 했다. 대시인 소동파는 “논하노니 오랑캐들은 중국의 정치로써 다스릴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한유와 소동파는 모두 당송시대 사람이다. 그 이전 전적(典籍)에는 이런 말이 없었을까? 쭈욱 거슬러 올라가 <논어>를 보자. “동이나 북적에 임금이 있다 해도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진시황 영정은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자 ‘황제(皇帝)’란 단어를 창안했다. 즉 ‘천명을 실행하는 지배자인 황제’는 중국 인민의 군주일 뿐 아니라 지구상에 거주하는 전 인류를 대표하는 주권자라는 것이다. 진시황에 의해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중화사상은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동아시아를 뒤덮기 시작했다.

<천자문(千字文)>에 등장하는 ‘신복융강(臣伏戎羌)’은 중화주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다. 천자문은 5세기 중국 남조 학자 주흥사가 만든 4언 절구 한시로, 신복융강이란 이웃 오랑캐들을 신하로 복종시킨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한문 습자 교본이기도 한 천자문에 이런 글이 등장했다는 건 당시 중국 교육시스템 속에 천하는 중국과 사이(四夷) 오랑캐로 이뤄진다는 관념이 확실하게 뿌리내렸다는 걸 증명한다.

그렇다면 중국을 둘러싼 이른바 오랑캐 국가들은 왜 화이질서에 반발하지 않았을까? 교역을 통해 중국에서 받는 물산과 문명의 혜택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화사상은 중국인 단독으로 품은 우주관이 아니다. 화이중 이(夷)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그 우주관을 공유하고 자신을 ‘변경’에 위치시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日本)’이란 국호를 들여다보자. 일본은 말 그대로 ‘해가 뜨는 곳’을 말한다. 흔히 해가 뜨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의 본’이란 어떤 곳에서 봤을 때 동쪽에 위치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어떤 곳이란 물론 중국이다. 일본이란 ‘중국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는 나라’라는 말이다. 이는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명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이에 대해 “만약 미합중국이 ‘멕시코 북쪽’이나 ‘캐나다 남쪽’이란 말을 국명으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주체성 없는 국명이라고 놀리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중국인들이 외래어를 번역하지 않고 일본이 제작한 한역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도 중화주의를 갖다 대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새 사조(思潮)가 물밀 듯이 짓쳐 들던 19세기 청나라 말, 중국인들은 새 문물을 가리키는 단어를 신조어로 만들 수 없었다.

아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저항감을 강하게 느꼈다는 말이다. 이제까지 중국어에 없었던 개념이나 술어를 새롭게 어휘로 추가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언어로는 기술할 수 없는 의미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중화사상에 금이 가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외래어 대부분을 음역했다. 외래어에 음역만을 부여한다는 건, 말하자면 통과를 위해 잠시 머무르는 것만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외래어를 모어(母語)의 정식 멤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모어의 의미체계를 변경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19세기 무렵 중국이 열강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중화주의가 탄탄대로를 걸은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민족 왕조인 원(元)나라가 들어섰을 때 중국식 천하 관념은 거센 도전을 받았다. 유목민 전통을 이어받은 몽골 왕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 왕조와 달랐다. 가령 원나라 새 황제들은 몽골의 종번(宗藩 왕족들)이 모두 모이는 상도(카라코룸)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매년 봄과 여름에는 반드시 상도에 머물러야 했다. 또 특정 파벌에서 완강히 반대할 경우에는 요행히 황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오래갈 수가 없었다.

이는 황제는 천명(天命)이라는 인간 세상 최고의 권위를 받았다는 개념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원나라 황후는 관례에 따라 자신이 직접 관할하는 호구(戶口)와 전량(田糧) 및 소속 관원을 갖고 자기 출신 가문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었다. 때문에 순제 이전 아홉 명 황제 가운데 영종과 명종은 피살당했고, 천순제는 아홉 살 때 군사반란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황제가 천명을 어깨에 지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국이 사이를 거느리는 화이질서는 큰 균열 없이 청(淸)대에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화이질서를 유지한 가장 큰 공로자가 제자백가로 대표되는 철학이 아니라 한자(漢字)였다는 사실이다.

중국 한자가 인쇄에 불편하다는 설은 지금도 공공연히 통용된다. 하지만 중국이 땅이 넓고 방언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도 상해사람들은 북경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북경어와 상해어의 차이는 유럽에 비한다면 불어와 이태리어, 혹은 불어와 스페인어 차이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중국에 한자가 없고 로마자와 같은 알파벳이 통용됐다면 북경에서 발행된 서적은 상해나 광동에서는 읽히기 어렵다. 그렇다면 각 지방에서 그 방언으로 번역해 출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렇게 됐다면 중국은 언어가 다른 몇몇 문화권으로 분열되고, 그런 문화권은 곧 정치적으로 독립했을지 모른다.

한자가 이로운 점은 발음에 구속되지 않고 자형(字形)만 보면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동일한 문자를 북경인은 북경어로 읽고, 광동인은 광동어로 읽으며, 상해인은 상해어로 읽는다. 나아가 한국인과 일본인도 이를 한국어, 일본어로 읽어 구성과 의미가 통하는 것이다. 한자를 판에 한 번 새겨놓으면 그 뒤로는 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동아시아 전체에서 통용된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을 보자. 이 시대 사대부들은 다들 한문(漢文)을 절차탁마했다. 그 결과 문어(文語)인 한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지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 것도 온통 중국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허균이 편집한 시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은 빼어난 서문으로 유명한데, 지은이는 영조시대 문인인 박태순이다. 서문에 등장하는 몇몇 구절을 인용하면 이렇다.

영락제.jpg
▲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원양함대를 파견했던 명나라 영락제.

“(전략)… 송나라의 여러 사람은 모두 두소릉을 종가로 삼고, 양대년은 별도로 서곤파를 주장했다. 명나라 문사들은 모두 이몽양을 높였지만 모녹문은 당형천을 홀로 추대했다. 당시(唐詩)를 뽑아놓은 것에는 <당음>, <당시품휘>, <당시고취>가 있는데… 소식이 사서를 짓지 않고… 여불위는 진나라를 도둑질했으나 그의 월령(月令)편은 <예경>에 들어있다. 식부는 한나라를 어지럽혔으나 그 사부(詞賦)는 <초사>에 들어있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 사람과 중국 책 이야기뿐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을 보면 중국적 논거(論據) 없이는 어떤 주장이나 논리도 전개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교육을 받을 때부터 중국 문헌을 교재로 썼기 때문이지만, 그 근저에는 한자가 매개로 작동하는 화이질서를 숭상하고 따르는 정서가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중 무역분쟁을 염두에 두고 중국 근세사를 더듬다 보면 명나라 영락제가 벌인 해외 원정이 왜 지속되지 못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중국이 막강했던 해양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서구 열강에 그렇게 당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 전체 역사로 볼 때 해양에 관심을 기울인 영락제 시대는 매우 예외적인 시절이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문화가 우월하므로 다른 곳에 손을 벌릴 필요가 없었다. 영락제가 정화(鄭和)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양함대를 바다로 출격시킨 것도 16~19세기 서구 열강들처럼 교역이익을 찾아서가 아니라 중화대국과 황제의 위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유일했던 해양시대 또한 화이질서를 확산시키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다.

주변국 전체가 중국에 진심으로 신복(臣服 신하가 되어 복종함)한 건 아니지만, 대다수 이적융강은 화이질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문화를 수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국은 쌍방 교역을 아비가 자식 대하듯 했다. 교역에 임하는 국가는 예외 없이 이를 허가하는 중국 황제의 관대함에 깊이 감사하고, 조공국이 되어 공손하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그 나라 인민을 훈계해 중국 국경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아야 했다.

만약 황제의 관대함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청나라 가경제 때 영국대사 에머스트는 청나라가 외국 사절들에게 강요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를 거부했다가 황제를 못 만났을 뿐 아니라 그날로 퇴경당하여 귀국했을 정도다.

19세기 메이지 유신을 통해 뒤늦게 근대화 물결에 올라탄 일본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가 무너지자 그 틈을 타 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히고자 애썼다. 방향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신(新) 화이질서’였다. 괴뢰국인 만주국을 만들 때 사용한 ‘오족협화(五族協和)’나 중국과 동남아를 침공할 때 썼던 ‘팔굉일우(八紘一宇)’는 그 시대를 증명하는 단어다.

1, 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에서 중국이 종주가 되는 화이질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류인 일본이 기도했던, 무력에 의한 신질서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천 년 넘게 지속돼온 이 질서가 아시아인 내면에 남긴 족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일본과 한국에서 중국이 점했던 위상을 미국이 이어받은 지 어언 70여 년.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새로운 ‘화(華)’로서 동아시아를 확실하게 좌지우지했다. 중국식 화이질서는 사라졌지만 화이질서라는 메카니즘은 그대로 가동되고 있었던 셈이다.

일대일로.jpg
▲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 /Vox(미국 인터넷 언론) 유튜브 영상

이제 다시 그 질서에 균열이 오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의 신 실크로드 정책)’를 내걸고 제국의 영광을 다시 찾겠다는 중국이 도박에 성공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니 중국을 종주로 하는 화이질서는 다시 가동될 수 있는 것일까?


참고자료

♣ 레이황 지음/권중달 옮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논하다>, 푸른역사

♣ 리궈룽 지음/이화승 옮김, <제국의 상점>, 소나무

♣ 열상고전연구회편, <한국의 서발(序跋)>, 바른글방

♣ 우치다 타츠루 지음/김경원 옮김, <일본변경론>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