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을 기념하는 비문

세 번째는 충무공에 관한 비문이 많다. 1955년 충무시가 세운 한산대첩비명(閑山大捷碑銘)에서는 겨레의 목숨을 건진 한산도 해전의 승리는 충무공의 한결같은 조국애의 공임을 밝히고 있으며 1958년 9월 전남 진도 벽파진(碧波津)에 세운 전첩비명(戰捷碑銘)에서도 명량해전에서 대승하여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국가와 겨레가 당한 위란을 막아낸 충무공의 공적을 찬양했다. 비는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있으면서 울돌목을 굽어보고 있다. 비문은 노산이 짓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1955년 12월 22일, 임진왜란 때 부산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부산시 중구 광복동에 있는 용두산공원에 충무공동상을 세웠다. 용두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동상은 조각가 김경승의 작품이며 뒷면에 적힌 비문은 이은상이 짓고 오제봉(吳濟峰)이 썼다.

1955년 고흥군 교육회가 주관하여 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마을 앞의 발포(鉢浦)에 발포유적기념비명(鉢浦遺蹟記念碑銘)을 세웠는데 기념비 전면에는 ‘이충무공 머무신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1957년 1월 거제 옥포에 세운 옥포대첩기념탑명(玉浦大捷記念塔銘) 등에도 한결같이 충무공의 나라와 겨레를 위한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려 새기고 있다.

최초의 거북선길이 있는 사천시 용현면 미룡마을을 지나면 노산의 시비와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는 모충(慕忠)공원이 있다. 해군사관학교 제장명 교수는 이곳에 있는 성웅 이순신공덕기념비의 비문은 설의식이 지었다고 한다. 경남 사천시 대방동 굴항(掘港·혹은 굴강이라고도 한다) 옆에는 1978년 5월 20일, 삼천포청년회의소가 주관하여 세운 이순신 동상이 있는데 동상 뒷면에는 이은상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여기에 계신 이 어른은 우리 겨레와 함께 영원히 같이 가시는 거룩한 지도자 충무공이시다. 그는 오색찬란한 역사의 면류관이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니 진실로 우리들의 자랑이요 또 힘이요 생명이시다’라고 적혀있다.

여수 팔경 중의 하나인 돌산에는 이충무공 유적기념비가 있는데 비문은 1963년 충무공 탄신기념일인 4월 28일,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정부 산하단체였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의 공동주관으로 1968년 4월 27일 광화문에 세운 이순신 장군 동상은 휘호를 박정희 대통령이, 글은 노산이 썼다. 좌대 뒷면에 명문(銘文)이 청동 주조로 들어가 있다. 동상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김세중 교수가 설계, 제작하였다. 이 동상이 광화문 앞에 세워진 직접적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함으로써 진행되었다고 한다.

1974년에 전남 목포시 죽교동의 유달산에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중에서 문화부(당시 문공부)에 등록된 제1호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이은상이 짓고 서희환이 썼다. 비문에는 ‘…… 저 산, 저 바다에 서려 있는 님의 맹세 조국의 제단에 자기 한 몸 바치셨네. 피 묻은 발자국 따라 나도 그 길 가오리다’라고 적혀 있다. 1979년 국비 1억 5천 500만 원을 투입하여 대첩을 이룬 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의 문어포마을 산정에 거북선을 대좌로 하여 세운 한산대첩 기념비 역시 휘호는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글은 노산, 글씨는 우석 김봉근이 썼다. 두억포 산 42번지 능선에 세웠는데 0.9m의 화강석 기단 위에 0.8m의 거북좌대, 3m의 거북선 위에 높이 15.3m 기념비신이 세워져 있고 학익진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념비는 10·26사건으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23년간 준공식을 하지 않다가 2013년 8월 16일의 제52회 한산대첩축제 기간 중에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전국에 세운 충혼탑

네 번째는 전국에 세워진 충혼탑이다. 1965년 현충원에 세운 경찰충혼탑에는 노산의 글을 김기승이 썼다.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의 서부전선 최북방에 애기봉의 민간인 통제선이 있다. 1966년 이곳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의 한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일천만 이산가족의 한과 같다’며 애기봉이라고 명명하고 친필 휘호를 남겼다. ‘피는 강물보다 진하다. 민족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 라고 쓴 노산 이은상의 헌시가 비문에 새겨져 있다.

1968년 횡성군 충혼탑(글씨 김기승), 1969년 강릉 경포대 충혼탑(글씨 김진백) 역시 제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글은 노산이 지었다. 1971년 현충원 충열대의 휘호는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헌시는 노산이 지었다. 1978년 평택시에 세운 반공청년순직자 추모비의 비문도 노산이 썼다.

오늘도 저 햇빛 속에

그대들 꽃다운 모습 보이고

그대들 고운 음성 들리네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쳤기에

가고도 가지 않는 그대들이라

조국의 산천과 역사와 함께

길이 살리라

정든 조국

정든 고향

여기서 그대들 길이 살리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전쟁 때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이곳에 있는 백마고지 기념관에 이은상의 추모시가 전시되어있다. 인천시 남구에 있는 인천지구 전적기념비 뒷면에는 노산이 1978년 4월에 지은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워온 피묻은 역사를 지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이자 자랑이기에 어떠한 침략이나 반역도 용서하지 못한다. 공산주의는 민족의 적이요 인류의 적이라. 우리는 그들을 무찌르기까지 싸울 것이다. 경기도 450만 도민의 정성과 힘을 뭉쳐 여기에 이 집을 짓고 바른 길을 외칠 것이다’라는 글을 장인식이 썼다.

다섯 번째로 각종 위령탑 비문도 썼었는데 1960년에 거창 박산골 위령탑, 1975년에 태백시 산업전사 위령탑은 휘호를 박정희 대통령이, 글은 노산이 지었다. 천안시에 일제 징용으로 끌려가 운명을 달리한 해외동포들을 위해 1972년에 세운 망향의 동산 위령탑은 탑신에 양각된 ‘망향의 동산’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탑신 아래 새겨진 헌시는 이은상이 썼다.

일본 오키나와에도 강제징용 위령탑이 있다. 오키나와는 ‘미래소년 코난’의 배경이고 아열대 산호초가 있는 아름다운 관광지이다. 1945년 3월 23일, 1천 400여 척, 18만 3천여 명으로 3개월에 걸쳐 진행된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은 민간인까지 동원되어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최대 규모의 유일한 지상전의 현장이다. 미국과 일본의 최후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1만 2천여 명의 미군과 10만 명의 일본군 그리고 주민 20만 명의 4분의 1일이 희생되었다. 징병과 징용 그리고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던 1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도 희생되었다. 그 가운데 430명의 이름만 현재 확인된 상태이다. 자민당 계열의 지사가 등장한 뒤에 보수화된 오키나와 정부가 예산을 삭감하여 유해 추가 발굴작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밝혀지면 보상 문제가 불거지기 때문에 아예 원천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대다수는 실종자로 되어 있을 뿐이다.이름이 확인된 분들 중에 한국적은 231명이고 나머지는 북한 출신이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1만 5천여 명이 있었다. 1975년 8월, 광복30주년을 맞이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섬의 남단 마부니 언덕에 세웠다. 이곳은 일본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 滿) 육군 준장과 일본군이 집단자결한 곳이다. 미군에게 쫓기던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도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당시 일본 군부가 미군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집단자결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죽은 한국인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돌을 모아 무덤 형태의 봉분으로 돌무덤의 위령탑을 세웠다. 한국인 위령탑에는 노산이 1975년 1월 6일 짓고, 서예가 서희환이 쓴 ‘영령들에게 바치는 노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위령탑의 비명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바라보면 조국은 원한의 먹구름 첩첩이 쌓이고 가리 천리만리

역사의 흙탕물 폭포같이 쏟아질 적에 양떼처럼 희생의 제물이 되어

바다 하늘 맞닿은 곳으로 끌려와 광풍에 생명의 등불 꺼지던 날

하늘도 울고 파도도 울고 핏줄기 뻗혀 오색무지개처럼

용솟고 치솟아 해달을 덮고 산과 바다를 회오리바람처럼 돌고

조국을 향하여 기원하던 목소리 지금도 귀에 들리는 영원한 메아리

이 위령탑 근처에는 일본인이 세운 조선인 위령탑이 있으며 한 시간 거리의 도카사키 섬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폭로한 배봉기 할머니를 비롯한 오키나와 위안부를 기리는 아리랑 위령탑도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1972년까지 일본 영토가 아닌 미국령이었다.

여섯 번째로 많은 비문은 박정희 정부의 역점사업에 관한 내용이다. 하동 역사(驛舍) 앞에 비문이 있다. 하동역은 1968년 진주-순천간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이 시작되었다. 1968년 2월 7일의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경전선전통(慶全線全通)’이라고 적힌 기념비 제막을 하였다. 옆에 있는 비문은 이은상이 짓고 서예가 갈물 이철경이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철도개통을 축하하는 내용인데 ‘여기 건설의 의욕은 또 하나의 새 역사를 기록했다. 지식과 기술과 땀으로 국토의 남단에 수를 놓았다. 지리산 맥과 섬진강 물이 영남의 호남을 가로막아 백리가 오히려 천리만 같이 멀고 어려운 길이더니 진주-순천 80키로를 연결하는 경전선 개통으로 단숨에 내닫게 된 것, 어찌 보람찬 일 아니겠느냐! ……’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축사를 했는데 난데없이 향토예비군을 설치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80년에 세운 삽교천유역 농업개발기념탑이 있는데 휘호는 최규하 대통령이 쓰고 설명문은 노산이, 글씨는 여초 김응현이 썼다. 노산이 쓴 설명문 끝부분에는 ‘다만 여기서 잊지 못하는 슬픈 기억은 지난해 10월 26일, 삽교호 준공식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즐거이 참석하고 귀경한 그 날 밤 세상을 떠난 그것이다. 대통령으로서 불행한 최후를 마쳤지마는 농업개발사업을 정책적으로 추진해왔고 특히 이곳에 열의를 기울였던 분이라 그의 공적은 길이 빛날 것이다’고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쓴 휘호가 하나 더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건이 일어나기 열흘 전에 여의도 전경련회관 준공을 기념해서 써준 ‘創造, 協同, 繁榮’이라는 휘호이다. 이 휘호를 화강암 기념석에 새겼는데 뒷면에는 노산 이은상이 짓고 일중 김충현이 쓴 ‘우리는 오늘 경제인들의 전당인 이 회관을 세우고 여기서 이상과 예지와 의욕을 모아 조국통일의 원동력을……’ 라는 글이 적혀있고 날짜는 준공기념식이 열린 1979년 11월 16일에 맞춰져 있다.

부산 시내 용두산공원에는 부산탑 건립과 함께 만든 용상이 있는데 이것을 받치는 돌에 근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부산탑 찬가가 새겨져 있는데 노산이 지었다.

이 외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들의 비문도 많이 썼다. 세계적인 유전 육종학자 우장춘(1898~1959년)은 생명공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루었는데 경기도 수원시 서문동 농촌진흥원 뒤 여기산에 있는 묘비문은 노산이 썼다. ‘불우와 고민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 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잠턴 학문의 바다 물결 한 번 치리라’ 그 후 동래구 온천동에 우장춘 기념관이 조성되고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국 최초의 점자교과서를 출판한 박두성(1888~1963년)이 활동했던 서울시 종로구 국립서울맹학교 내에 박두성의 추모비가 있다. 박두성은 한글점자를 보급하고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하였으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만들어 지식의 눈을 뜨게 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최초의 한글점자인 훈맹정음(訓盲正音)을 만들어 맹인들의 세종대왕이라고 불린다. 노산 이은상이 그의 서거 3주기를 맞아 추모비 비문을 썼다. 추모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괴인 임의 정성 / 어두운 가슴마다 광명을 던지셨소 / 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 /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 / 한숨을 돌이켜서 임마다 노랫소리 / 그 공덕 잊으리까 영원한 칭송 받으소서.”

경남 최초의 의사인 김형철의 비문도 노산이 썼다. 1965년 8월 15일에 노산이 쓴 김형철 비문은 마산의사회 회원들이 비석을 세웠다.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묘지는 마산대학교 옆에 있다. 비문의 내용은 ‘세상에 학문이 귀하지 않은 것 아니지마는 학문보다도 사람됨이 더 귀한 것인데 마산 의료계의 선배 지전 김형철 선생은 실로 인격과 학문을 갖추었던 이다. 그는 일찍 1919년 독립만세운동 때에 부상동료들의 치료를 희생적으로 담당하여 민족정신을 발휘했었고 이래 40년 동안 시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깨끗이 살다간 이기에 우리 후배들은 그를 잊지 못하고 여기 묘표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며 길이 기념하려 한다’다.

이은상이 쓴 200편 이상의 금석문 중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첫째는 같은 지역에 사는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비문을 모두 적어주어서 보는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비가 경북 영덕에 있는 문명기 비와 3·1운동 기념비이다. 피해자인 군민들을 위로하는 글을 쓴 손으로 가해자인 친일파를 칭송하는 글을 쓴 것이다. 마산 3·15의거를 불상사라고 하면서도 4·19학생혁명기념탑의 비문을 쓴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이승만 대통령이 휘호를, 비문은 노산이 썼다. 둘째는 거의 전국을 다니면서 세운 대부분의 충무공, 역사유적, 근대화 비문의 앞면은 박정희 대통령, 뒷면은 이은상이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4·19 이후에 쓴 거창민간인학살사건 위령비문을 5·16쿠데타 이후에 군인들이 비문의 내용을 추궁하자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국회의원 신중목의 부탁으로 노산이 썼다고 기억하고 있으며 실제 위령비에 노산 이은상이 썼다고 새겨져 있다. 넷째 모든 비문은 대단히 감동적으로 쓰여져서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뜨겁게 혹은 아프게 하고 있다.


참고자료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254쪽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65쪽

김용섭, <논문집 제18집 3권>, 노산시조에 나타난 조국애, 민족애의 배경연구, 삼척공업전문대학(1985년), 19쪽

국제신문, 걷고 싶은 길 17 사천 최초 거북선길, 2017년 1월 15일 자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152쪽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153쪽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155쪽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16쪽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115쪽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해군사관학교(2018년), 159쪽

경향신문, 아침을 열며 애기봉의 성탄트리, 2011년 12월 4일 자

강정숙, <일본군 위안부, 알고 있나요?>, 독립기념관(2015년), 110쪽

<시사IN>, 2017년 10월 7일 자

국제신문, 박대통령 사후 휘호(?) 화제, 2004년 10월 2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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