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운명 결정한 적 없는 슬픈 도시

섬들의 여왕 시칠리아에 기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꼭 내 편이 하나 생긴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아무리 커도 그래도 섬인데 축구공을 한 번 뻥 차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바다에 풍덩 빠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기차가 있다니, 그 햇빛 강렬한 시칠리아가 "짠" 하고 나타나 "나 여기 있지롱!"하면서 내게로 다가 온 느낌이 들었다.

나의 메시나 숙소의 주인 줸달리나의 배웅을 받고 메시나역으로 가서 곧장 팔레르모행 기차에 올랐다. 두 시간 반, 이번에는 티레니아해와 조우다.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명경 알 같은 옥색의 바다를 상상해 보시라!

하룻밤을 자고나면 도시는 어제 낯설었던 그 도시가 더 이상 아니다. 마치 어릴 적 내가 뛰어 놀았던 그 골목길처럼 친근하고 가까이 와 있곤 했다. 역에 내릴 때 굳건하게 빗장을 치고 경계를 풀지 못했던 내가 완전히 무장해제를 해 버리고 만다. 일종의 밤이 주는 유익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겨울을 시칠리아에서 보낸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고 하는데 굳이 겨울이 아니라 겨우 하룻밤을 보낸 사람도 이미 친구가 되어 버리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더군다나 나는 여기서 적어도 열흘은 더 있을 것인데.

▲ 팔레르모 대성당 모습. /조문환

◇인간적인 도시 = 팔레르모(Palermo)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체팔루(Cefalu)로 가기 위해 호텔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가 골목길을 타고 내게로 엄습 해 오는 것을 느꼈다. 단지 하룻밤 묵었을 뿐인데 그랬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어제 오후 내내 어둡고 낯선 골목길을 돈 것과, 이곳의 전통 시장인 볼라로 시장(Ballaro Market)에서 포도와 감을 흥정해가면서 산 것과, 그 시장에 있는 이발소에 쳐들어가 염색하는 모자(母子)에게 말을 걸면서 "멋지다, 아들 잘 뒀네요, 당신 행복하겠어요" 말하고 기분 좋게 해 준 것과, 이발사에게는 어깨 두드리며 엄지손가락 치켜세워 주었던 것과, 이곳의 중심가인 비토리오 에마뉴엘 거리(via Vittorio Emanuele)에서 지선으로 빠져나와 어둡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온 가족이 인근 집 식구들과 골목에 모여 아이들 공부 돌봐 주는 모습을 보고 참 좋은 이웃이라고 칭찬하고 같이 잠시 놀았던 것과, 저녁 무렵 숙소로 오는 길목에서 군밤 장수와 그 아들 그리고 군밤 장수 친구 셋이서 나에게 호객 행위 했을 때 1유로 주고 군밤 다섯 톨 사서 군밤 장수에게 하나, 아들에게 하나, 군밤 장수 친구에게 하나 주고 잠시 장난 쳤던 것과, 식당에서 점심 식사 할 때 길거리 음악가들이 갑자기 나타나 몇 곡 연주하고 모자 돌릴 때 2유로 던져 준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저 골목길에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들, 바람이 불면 온 골목길을 휘감아 도는 저 정처 없는 것들 때문일 수 있다. 문을 열면 쓰레기 더미가 가득했고 그 쓰레기가 바람이 불면 골목길을 뒤덮어 버리는 일은 괴테 때나 지금이나 한가지였다.

시정을 돌보는 사람들이 청소 예산을 투입하여 청소를 해 버리면 닳아 버린 빗자루 밑에 쌓여 있는 쓰레기가 드러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시의 재정이 어떻게 쓰였는지 들통이 날 지경이라 굳이 청소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상황이었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들 시칠리아의 도시들과는 달리 유달리 깔끔을 떨었던 나의 전 여행지 잘츠부르크나 인스브루크에서는 몰인간성을 보았다. 사람이나 역사도 그와 같은 것일 수 있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놀지 않듯이 허접한 신화가 더 인간적일 수 있듯이 말이다.

▲ 팔레르모 빅토리오 에마뉴엘 거리에는 수백 년 묵은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조문환

◇머리에서 손과 발의 거리 = 경치도 그랬나 보다. 나폴리에서 팔레르모로 오는 4박5일간의 긴 항해 속에서 겪는 극심한 멀미에서 깨어난 괴테는 팔레르모 항구에서 내려 아지랑이들 사이에 오히려 더 또렷이 보이는 대상들을 바라보았다. 원근의 명확함, 배들과 근교의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마치 능숙한 화가가 마무리 칠을 해 놓아 대상들을 명료하게 구분시켜 놓은 그림을 보는 듯했다. 옅은 안개가 내려앉은 산이 쾌청한 날 때보다 능선이 더 또렷이 보이고 원근감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때로는 아지랑이와 안개가 오히려 제대로 볼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역사라는 것도 그렇지 싶다. 괴테가 동전 수집실에 구경 갔을 때 보았던 고대 도시들의 동전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보아 왔던 로마제국 황제들을 동일한 옆모습으로만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역사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이를 봄으로써 시칠리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가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꼈다.

치장되고 정리된 역사가 아닌 팔레르모 골목길에 쓰레기 날리듯이 널브러지고 도처에 처박혀 있으면서도 코 묻은 작은 동전으로도 역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시칠리아를 뺀 이탈리아는 영혼에 진짜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시칠리아에 비로소 모든 것의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괴테라는 사람은 사실 머리가 너무 명석하다. 머리가 너무 명석하면 머리에서 가슴으로, 손으로, 발로 가는 거리가 너무 멀어지게 된다. 이런 분들은 현장의 일은 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작가로 삶을 살았다. 그가 아무리 기성 정치나 거대 세력인 가톨릭과 같은 당시 교회들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쏟아 놓았지만 혁명과 개혁을 향한 발걸음은 단 한 발자국도 내 딛지 못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손과 발로 오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공화정 시대 로마 = 역사상 로마라는 나라는 머리보다는 가슴과 손과 발이 먼저 작동한 나라였다. 적어도 제국으로 나아가기 전 공화정 시대에는 그랬었다. 식수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단수 조치가 내려지는 곳은 귀족 집안이었다. 전쟁 자금도, 도로 건설도 귀족들이 사재를 털어서 바친 일들이 많았다.

원로원은 기가 막힌 중심 추였다. 뭐든지 이곳에서 토론하면 결과를 만들어 냈다. 해도 해도 안 되면 최종 결정 기구인 민회에 회부했다. 메시나에 대한 참전도 결국 민회에서 결정된 것이다. 머리와 가슴, 손과 발이 원활하게 작동했던 시기였다.

끊이지 않고 인재가 배출되도록 한 조직도 원로원이었다. 나이 많은 장로들의 모임이 아닌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을 가진 냉철한 정신의 소유자들의 집단이었다. 오늘 날 우리나라의 국회가 이런 자들로 구성되면 어떨까?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머리로만 살았던 과거에서 가슴과 심장으로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손과 발로 살기 위한 하나의 훈련 과정이다.

널브러진 가슴의 나라 팔레르모,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 보지 못한 나라, 어느 시대에서든지 쟁탈의 대상이 되었던 나라, 이 널브러진 나라의 심장을 서로 가지겠다고 세상 나라들이 우격다짐 했던 나라, 그래서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이 온 도시를 뒤덮고 있는 나라, 카르타고의 150마리의 코끼리 군단이 일시에 몰살하게 된 나라, 지금도 마피아들의 힘이 거센 나라.

나는 오전 9시20분발 기차를 타고 체팔루로 향했다. 이때만 해도 3시 15분에 돌아오는 기차를 탈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가 타고 온 기차는 12시40분 기차였다. 미안하지만 체팔루에서는 뛰는 가슴을 만나지 못하였다. 널브러진 심장일지라도, 터진 가슴을 가졌을지라도 그곳 팔레르모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