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빠짐없이 썼던 집념
집권 5년 국정일기 공식화
일성록, 조선 최고기록 평가

◇정조의 일기 <일성록> = 구름이 많이 낀 밤이었다. 바람도 많이 불어, 이제 그것의 흔적을 찾기 힘든 그믐달의 모습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흩어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내관들의 옷깃소리, 궁녀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만이 이곳이 사람 사는 곳임을 알려주곤 했다. 왕의 침전, 밤의 전령 부엉이마저 접근하지 못하는 엄숙한 공간에 침묵은 깊어졌다. 왕은 오늘도 일기를 쓰고 있다. 세손 시절부터 취침 전 일기를 쓰는 습관으로 그는 오늘도 먹을 가는 내관 한 명을 둔 채 그날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조 재위1년(1777년) 8월 11일 밤, 몇 주 전 일어난 암살사건을 피해 거처를 옮긴 곳에서 왕은 습관대로 일기를 써나갔다.

"전하, 피하소서 자객이 들었나이다."

침소 앞에서 내관의 급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기다리거라."

왕은 마치지 못한 마지막 글을 쓰며 모든 정신을 붓 끝에 두었다. 화살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는 뒤섞였다.

왕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애써 피하며 찾지 못한 마지막 문장에 집중하였다. 죽음이라는 결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루의 결말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붓을 가는 내관의 땀이 흘러 벼루의 물이 되고 그의 손떨림에 먹물이 튀어 왕의 침소를 더럽힐지라도 왕은 집중했고 신중했다.

왕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날 하루를 마무리했고 그의 정신은 보다 정리되고 마음은 안정되었다. 하루를 마친 것이다.

"활을 가져 오너라."

먹을 갈았던 내관은 얼룩이 묻은 손을 그제서야 옷깃에 닦고 일어섰다. 활은 왕의 손에 들렸고 세상은 고요해졌다. (정조 1년 암살사건을 사실과 상상으로 재구성해보았다.)

나는 정조 암살사건에 <일성록>을 생각했다. 취침 전 반드시 일기를 쓰고 잤다는 그의 기록으로 보아 그는 그날 밤에도 일기를 쓰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세손 시절 시작해 집권 5년차 국정일기로 공식화한, 조선왕조실록보다 더 세심한 내용이 담긴 조선시대 최고 기록 중 하나, 201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담은 기록, 일성록은 한 사람의 간절함으로 만들어진 운명에 도전한 기록이었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특히 살인적인 스케줄로 하루를 보냈던 왕이 일기로 그날의 하루를 정리했다는 것은 한 인간의 위대한 인생을 엿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일기 쓰는 것을 나름 습관화한 사람이긴 하나, 매일 쓴 것은 아니었다. 생의 기쁨이 지속된 순간엔 일기쓰기는 잊기 쉬운 편이다. 평안의 지속은 만족감으로 만족감은 일기조차 필요 없는 나태함으로 나타났다. 또한 지난한 고난은 고통스러운 단어의 계속으로 잊어야 하는 것들을 계속 생각나게 해 펜을 놓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가지 핑계로 나의 일기는 지속성을 지니지는 못했다.

정조의 인생은 어떠했기에 지난한 고난에도 일기쓰기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분의 인생이 궁금했다.

▲ 정조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문집 <홍재전서>는 180권 100책 10갑에 달한다. 사진은 경기도 수원 화성에 있는 정조대왕 동상. /경남도민일보 DB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윤음, 그의 나이 25세, 정조의 이 위험한 말은 그의 정체성을 드러냈지만 그의 안전을 담보하기 힘든 도전의 말이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말에 담긴 위험과 이 말로 이어질 고통스러운 그의 앞날을 예측하면서도 그는 이 말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비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날, 뒤주에서 죽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옷도 벗지 못하고 잠을 청했던 수많은 밤들, 그의 윤음은 운명 앞에 당당히 선 한 남자를 생각나게 했다.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부세력에게는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 당시 세력의 주축인 노론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던 왕, 그러나 그는 왕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개인적인 복수를 백성의 생활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그런 정조대왕이 꿈꾸던 조선은 어떠했을까?

정조는 목표가 뚜렷한 왕이었다. [정조평전/박현모]에 의하면 정조2년 6월 여러 신하들이 모인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왕은 개혁의 방향을 말했다. 핵심은 경제살리기와 군대개혁, 인재선발, 건전한 국가재정이었다.

이를 위해 왕은 첫 번째로 세금을 가볍게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장 자유화 조치 등을 통해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둘째 수어청을 축소하고 장용영을 창설하는 등 강한 군대를 길러 백성들을 안전하게 하였다. 셋째 출신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인재등용의 요체는 인재를 잘 기르고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보아 규장각이라는 싱크탱크를 세우고 초계문신제 같은 인재양성제도를 도입했다. 넷째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려했다. 이를 위해 수원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해 재정난을 해결하려 했다.

정조는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다. 궁궐 밖으로 나가 굶주린 백성이 없는지 살피고 다녔고 억울한 죄수가 생기지 않도록 몇차례나 반복해 범죄사실을 심리하곤 했다. 백성들은 비록 어리석어 보이나 지극히 신명한 자들로서 그들을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곧 하늘을 노하게 만드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 정조가 세손 시절 시작해 집권 5년차 국정일기로 공식화한 <일성록>은 조선시대 최고 기록물 중 하나다. 지난 201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됐다. /연합뉴스
◇개인 일기를 넘어선 국정기록 = 정조는 기록을 즐겨한 왕이었다. 앞에서 말한 개인의 일기를 넘어선 국정기록이 된 <일성록>,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사망까지 사형대상 범죄에 대해 왕이 손수 내린 판결을 모은 일종의 형사판례집인 <심리록>, 경연이나 제반행사에서 대신들과 나눈 대화와 전교를 수록한 <일득록>,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까지 그는 많은 기록을 남겼다.

왕은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일을 기록했을까? 그 이유에 대해 홍재전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무릇 임금의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후세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다. 나라에서 좌사와 우사를 설치한 것은 좌사로 하여금 행동을 기록하게 하고 우사로 하여금 말을 기록하도록 한 것이니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이라도 혹 빠뜨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에 의거해 있는 그대로 기록해"놓아야 후세인들의 성찰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일기록에 정조의 국가 경영을 '사중지공'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조의 사중지공론은 영우원 천장 논의가 한창이던 1789년에 제시되었다. 그는 신하들과 대화하다가 "사심안에 공심이 있으며 공심안에 사심이 있으니, 사심안의 공심은 외양은 비록 굽어도 내심은 용서할 만하며 공심안의 사심은 겉모습은 비록 정직해도 속마음은 굽어있다"라고 말했다. 정조가 취한 조치의 출발점은 사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는 그것을 개인적인 이득으로(사심) 탐하지 않고 백성을 위하는 행동으로(공심) 향하였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행동을 경계하고 후손에게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록하고 그것을 남겼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정조의 교훈이 필요한지 모른다. 사심안의 공심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누군가와 공심안의 사심으로 정직을 가장하고 굽어 있는 무엇을 말하는 자들, 그것들의 공과는 무엇이었는지 역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알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부디 정조대왕의 말처럼 백성의 억울함과 고통으로 하늘이 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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